항목 ID | GC01701577 |
---|---|
한자 | 金時山旌閭忠臣門 |
영어의미역 | Memorial Gate for Gim Sisan, the Loyalist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백교노동길 441[노동리 35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춘진,박범 |
성격 | 정려 |
---|---|
양식 | 주심포 양식 |
건립시기/일시 | 1824년![]() |
정면칸수 | 1칸 |
측면칸수 | 1칸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백교노동길 441[노동리 351]
![]() |
관리자 | 김무경 |
문화재 지정번호 | 공주시 유형문화유산 |
문화재 지정일 | 1997년 6월 5일![]() |
문화재 지정일 | 2024년 5월 17일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노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충신 김시산의 정려.
[위치]
공주시청에서 백제 큰 다리를 건너 국도 32호선을 따라 유구 방면으로 가다 보면 유구읍소재지 직전에 만년교가 있다. 만년교를 지나 100m 정도 유구읍 쪽으로 가면 왼쪽에 노동리로 들어가는 작은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약 4.3㎞ 정도 가면 노동리에 이른다. 김시산 정려 충신문은 마을회관 뒤쪽으로 100m 거리에 있다.
[변천]
김시산 정려 충신문은 경주김씨 김시산(金時山)[1656~1739]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24년(순조 24)에 명정을 받아 건립한 것이다. 경주김씨 김시산의 자는 선경(善慶)이다. 경주김씨 김곤(金稇)의 10세손이다. 아버지는 김승진(金承振)이고, 어머니는 문사인(文思仁)의 딸 함양문씨인데, 김시산은 둘째 아들이었다. 살면서 세 번 국상[숙종, 경종, 경종 계비 선의왕후]을 당했는데, 그때마다 산에 올라가 목 놓아 슬피 울었다. 매번 3년간 잠을 자지 않은 채 곡을 하며 소식(素食)하였고, 기일에는 행동을 유의하였다고 한다. 김시산이 죽은 지 85년 후인 1823년(순조 23)에 충청도 암행어사 이언순(李彦淳)이 상소하여 김시산의 충심이 조정에 알려졌다. 1824년에 김시산은 가선대부에 증직되어 정려를 세우게 되었다.
김시산 정려 충신문은 1923년에 김시산의 9세손인 김정구(金正龜) 등이 중수한 것이다. 후손의 제보에 따르면 원래 김시산의 묘소 앞에 있었는데, 192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1993~1994년경에 문중에서 지붕을 개수하였고, 단청을 하였다.
김시산 정려 충신문을 옮긴 것은 마을의 풍수지리를 고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처음 정려를 세운 자리가 땅의 형세상 뱀의 머리를 누르는 형국이라 마을이 번창하지 않는다고 여겼다고 한다. 이에 정려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김시산 정려 충신문은 1997년 6월 5일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21호로 지정되었다가 2024년 5월 17일 조례에 따라 공주시 유형문화유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형태]
김시산 정려 충신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주심포 양식이다. 시멘트 단 위에 사각 화강암 들보와 원형의 기둥을 세웠고 사면에 홍살을 둘렀다. 정려 안 중앙에는 ‘충신증가선대부행용양위부호군김시산지문상지이십오년갑신오월일명정(忠臣贈嘉善大夫行龍驤衛副護軍金時山之門上之二十五年甲申五月日命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 뒤쪽에는 1825년(순조 25)에 이면식(李冕植)이 쓴 「정려기」가 걸려 있다. 이 「정려기」에 따르면 김시산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정성으로 받들었으며,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