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0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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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明烈 |
영어음역 | Park Myeongryeol |
영어의미역 | Park Myeongryeol |
이칭/별칭 | 박명열(朴命烈)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형국,박범 |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공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0년 1월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벌인 공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반일 가두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였다. 그 후 공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김순태(金淳泰), 공주소년연맹 위원장 안병두(安炳斗) 등과 함께 반전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당시 세계대공황으로 인해 경제 조건이 악화되고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소수의 지식인과 학생 중심의 활동은 농민과 노동자 중심의 대중 활동으로 전환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국 곳곳에서 농민조합과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움직임이 활발한 가운데 공주에서도 사회주의 계열 청년들을 중심으로 비밀조직을 만들고 대중 활동가를 양성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31년 박명렬은 안병두, 이영근, >이도원, 구자명 등 공주고등보통학교 동창들과 함께 조직을 구성하였다. 이후 1932년 3월 5일경 영명학교(永明學校)를 비롯한 읍내 곳곳에 반전 벽보를 붙이고 격문을 뿌렸다.
반제격문사건으로 인하여 1932년 3월 10일 박명렬은 다른 4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조사 과정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한 것이 발각되었다. 동년 12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1933년 2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의 형이 확정되기까지 11개월가량 옥고를 치렀다. 그 뒤에도 공주에서 독서회를 조직하여 반일사상을 고취하다 1935년 7월 2일경에 체포되어 한 달여 동안 조사를 받고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의 예심(豫審)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93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