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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056
한자 李觀稙
영어음역 Yi Gwanjik
영어의미역 Yi Gwanjik
이칭/별칭 치용(穉用),해관(海盥)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사현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형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사현리
성별
생년 1883년연표보기
몰년 1972년연표보기
본관 한산(韓山)
대표경력 신흥강습소 군사교관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이관직(李觀稙)은 1883년(고종 20) 7월 10일 현재의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사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00년(고종 37) 대한제국(大韓帝國)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의 보병과에 입학하여 1903년(고종 40) 9월 20일에 졸업하였다. 1905년(고종 42) 4월 18일부터 육군 보병 참위(參尉)로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에서 근무하였고, 1907년(순종 1) 4월 30일 육군 보병 부위(副尉)로서 진위보병(鎭衛步兵) 제2대대에서 복무하였다.

군대 해산 후 1907년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하중환(河重煥)·안상덕(安相德)·김기수(金基洙) 등과 함께 경상북도 안동(安東) 지역에서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여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된 내용의 구국교육으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또한, 1907년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상동교회(尙洞敎會) 지하실에서 조직하여 일제 침략에 대항하는 구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9월에는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적합한 후보지역을 물색하기 휘하여 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장유순(張裕淳) 등 4명이 함께 백지(白紙)장수로 가장하여 간도(間島)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정착지 선정활동을 하였다. 1911년 봄 신민회에서 지난해 독립 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답사 보고에 따라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재만 한인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는 한편 조국 광복을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창설하였다.

이관직이동녕·이광(李光)·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군사 교관이 되어 사관생도들의 훈련을 담당하였고,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한 본래의 취지에 따라 육영 영농에 필요한 자금의 조달에 힘썼다. 1916년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고자 입국하여 활동하였으며,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이관직은 배재학당(培材學堂)의 학생 동원 책임자로 활동 중에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 고향인 충청남도 공주로 돌아와 광정성결교회 집사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1972년 10월 19일 89세로 별세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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