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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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沈源澤 |
영어음역 | Sim Wontae k |
영어의미역 | Sim Wontae 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호계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형국,박범 |
성격 | 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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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호계리 |
성별 | 남 |
몰년 | 1913년![]() |
[정의]
조선 말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의병.
[활동사항]
심원택은 충청남도 공주군 사곡면 호계리에서 태어났으며, 윤이병(尹履炳) 등 동지들과 함께 1907년 6월 19일 동우회(同友會)를 조직하여 일본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고 매국 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이 체결되어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였다.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일본의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林董]가 내한하자 서울 내 민심이 들끓었으며, 고종 황제의 양위설 및 일본 도쿄로의 이어설(移御說)이 유포되었다. 동우회(同友會)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의 주도로 반일 전단이 발행되었다. 7월 18일 서울에서는 1,000명이 동우회 사무소에 모여 윤이병을 회장, 김재붕을 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이때 심원택도 평의원으로 뽑혔다. 임원 선출 이후 동우회 간부들은 회원들과 민중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종로로 갔으며, 이미 황제 양위설을 듣고 몰려든 군중과 합류하였다. 그 후 대한문으로 나아가 집회를 벌이다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다.
심원택은 귀가한 윤이병을 대신해 회장 대리를 맡았으며, 7월 20일 황제의 강제 퇴위 소식이 알려지자 환구단[석고단] 앞에 가서 집회를 열었다. 그 후 서소문에 있던 이완용 자택의 방화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심원택을 포함한 동우회 간부들과 회원, 일반 군중이 다수 체포되었다. 이 일로 심원택은 1908년(순종 2) 1월 16일 평리원(平理院)에서 10년 유배형을 선고받았고, 전라남도 신안군에 있는 지도(智島)에 유배되어 2년 6개월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유배에서 돌아온 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탄하자 통분해하다가 1913년에 병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