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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008
한자 近現代
영어의미역 Contemporary Histor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진호

[정의]

일제강점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의 역사.

[개설]

한국 역사에서 근현대라 함은 보통 일제의 대한제국에 대한 주권 침탈에 의한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8월부터 해방을 거쳐 현재에 이르는 시기까지를 말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는 크게 1910년대의 무단통치기, 1920년대의 문화정치기로 불리는 민족분열통치기, 1930년대 이후부터 1945년 일제 패망까지의 파쇼통치기 등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한 이후 총독부 체제로 개편하면서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 체제를 구축하였다. 공주는 충청도가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로 분할되었던 1896년 8월부터 대전으로 충청남도 도청이 이전되었던 1932년 10월까지 충청남도의 도청 소재지였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공주는 도청, 지방 법원, 등기소, 경찰서, 세무서, 형무소, 우체국, 초등학교, 중학교 등 충청남도의 각종 관청 시설이 집중되어 있었다.

일제는 1910년 9월 지방 관제에 따라 군수(칙임관), 군서기 및 기수(판임관)가 군 행정을 담당하였다.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공주군의 동쪽 79개 동리는 연기군에, 남동쪽 86개 동리는 대전군에, 남쪽 2개리는 부여군에 각각 편입되었으며, 남서부의 연기군·노성군·부여군·정산군의 9개 동리를 편입하여 13개면·6개 정·207개 리의 공주군으로 축소되었다.

1917년 6월 총독부 제령으로 조선의 면제가 실시되어 공주면은 지정면이 되었으며 지정면은 부분적으로 자치권이 부여되는 등 조선총독부로부터 특별한 취급을 받는 특수 행정 지역이었다. 지정면인 공주면의 면장은 일본인이 맡았으며 면협의원도 70~80%가 일본인으로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면협의회는 1920년 총독부 제령13호에 의거 설립되어 면장의 자문과 면 세입 세출 예산, 법령이 정한 것 이외의 수수료·사용료 부과금, 부역 및 현품 부과 징수, 차입금, 예산외 의무 부담 권리 폐기, 면유 재산 처분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지정면의 면협의원은 면 부과금을 5원 이상 납부한 특정 유권자의 비밀 보통 선거로 선출하였으나 대다수 일반 면의 면협의원은 주민들이 추천하면 군수가 임명하였다.

1920년대(1923·1926·1929) 공주의 면협의원은 김갑순, 서범순, 오경달, 이범규, 권익채 등이 역임하였다. 1930년대(1931·1935·1939)는 김갑순, 오경달, 권익채, 홍원표, 홍긍식, 이정구, 윤용섭, 박치련, 지헌정, 정한명, 양천손, 이강일, 이복문 등이었다. 이들은 대지주이거나 관직 및 공직에 있었거나 아니면 상업 활동에 종사한 사람으로 대부분 상당한 자산가들이었다.

이에 비해 군수의 지명으로 임명된 대다수 일반 면의 면협의원은 주로 면내 유력 동족 마을 대표자, 토지 재산과 사회 활동 능력을 갖춘 자, 당국의 신뢰를 받거나 사회적 인망이 있는 면내 유지 급들이었다. 특히 면장의 경우 면내 특정 동족마을의 유지들이 각 면의 실세로서 해방 이후 시기까지 면장직을 독점하였다.

[현대]

일제의 무조건 항복과 패망으로 1910년에 강탈당한 국가의 주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진입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완전한 주권 회복은 힘들게 되었다. 이후 1948년 8월과 9월 남북에서 별도의 정치 세력들이 각각의 단독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결국 한 민족은 분단의 역사를 걷게 되었다. 일제의 패망과 외국군의 진주 및 민족의 분단으로 역사의 굴절과 왜곡으로 한국 현대사가 시작되었다.

정부 수립 이전까지 공주는 좌우 계열이 충돌하는 정치적 소용돌이를 겪지 않았다. 1946년 2월 ‘충남지방실정조사보고’에서 공주군청은 ‘군민 전체의 사상 태도가 온순 상식적이고 합법적이다’라는 보고를, 공주경찰서는 ‘관내 12개 주재소가 자력으로 범죄 방지에 전력을 다하여 건국 사업에 유감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됨’이라는 보고한 것으로 보아 타 지역에 비해 당시 공주 지역의 치안 상황은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문제를 협의한 미·영·소의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의한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과 1947년 2차에 걸쳐 소집되었음에도 불구 한국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국 UN의 결정에 의해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남한 지역만의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이에 1948년 5월 10일 김구를 주축으로 하는 상해임시정부 세력 대부분이 불참한 가운데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공주 지역에서는 금강을 중심으로 이남 1개 읍 4개 면(공주읍·이인면·탄천면·계룡면·반포면) 선거인수 71,791명을 갑구로, 이북 8개 면(장기면·의당면·정안면·우성면·사곡면·신풍면·유구면) 선거인수 83,135명을 을구로 하는 선거구가 확정되어 투표가 실시되었다. 선거 입후보자들 상당수는 일제하에 면장이나 면협의원을 역임한 인사들이었다.

투표 결과 갑구는 홍주 의병을 주도했던 김복한의 아들 김명동(10,676표) 후보자가, 을구는 신방현(8,415표) 후보자가 각각 당선되었다. 갑구는 당선자 김명동과 염우량(5,207표), 박충식(4,991표), 권태훈(3,881표), 정인각(3,650표) 등 5명이 입후보하였고, 을구는 당선자 신병현과 김평중(7,330표), 이종백(6,843표), 이건철(3,954표), 이규원(2,618표), 한보순(2,007표), 홍순량(1,865표) 등 7명이 입후보하여 치열한 선거전을 치렀다.

이어 1950년 5·30선거에서는 갑구는 박충식, 염우량, 진상구, 정경모, 김제원, 신현상, 서상빈, 김종석 등 8명이, 을구는 김명동, 정인각, 이종백, 원종국, 문홍범, 유응호, 신방현, 이은봉, 김승태, 정종열 등 10명이 입후보하여 난립의 양상을 보였다. 투표 결과 갑구는 박충식이, 을구는 김명동이 각각 당선이 되었다. 제헌의원이었던 김동명은 선거구를 갑구에서 을구로 옮겼음에도 당선되었다. 또한 이 선거에서는 친일파 반민족 행위자로 체포되었던 김갑순의 장남 김종석과 장손 김승태가 각각 갑구와 을구에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한국 전쟁 중에 김명동의 변고로 1951년 2월 보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보궐 선거에서는 중앙 정계의 거물인 윤치영과 조병옥이 접전을 벌여 이승만의 지지를 받은 윤치영(14,739표)이 영명학교 졸업을 연고로 출마한 조병옥(8,550표)과 염우량, 정종열 등에게 승리하였다.

한편 1949년 말의 농지 개혁으로 공주 지역의 대표적인 지주들이었던 서덕순, 오흥근, 오학근, 김성원, 유근석, 오창선, 원정선, 황정호, 윤택보, 박보현, 유병철, 우옥화, 김민환, 김갑환 등은 많은 토지를 몰수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315일 만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함으로써 동족 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인민군의 손에 넘어가고 전선은 계속 남쪽으로 밀리게 되었다. 공주에서도 전쟁 당일 신문이나 라디오를 통하여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접하였으나 공주 지역으로 군경이나 그 가족들의 피난 행렬이 들어오고 서울 방면으로 출향한 지역민들이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전쟁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공주시국대책위원회를 조직한 지역민들은 피난 군경·관료 및 그 가족들의 식량과 숙소를 제공하는 등 구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몰려드는 피난민들로 인하여 각종 부작용과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7월 6일부터 공주 지역에도 포성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계엄사령관인 공주경찰서장은 경거망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면서 치안 유지를 위하여 노력하였고, 미군 사령관의 야간 통행금지와 위반자 무조건 총살 명령이 하달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지역민들도 피난 행렬에 가세하였다.

한편 제13연대 국군이 공주를 퇴각하면서 공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죄익 죄수와 공주 지역보도연맹원을 왕촌 골짜기에서 집단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고, 계룡면 금대리 인근에서도 약 15명의 청년들이 경찰 소집 통고를 받고 모였다가 죽음을 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고 전한다. 이후 북한 인민군이 장악한 공주 지역은 조선노동당과 인민위원회, 민주청년동맹, 여성동맹, 직업동맹, 농민동맹 등과 같은 조직원들이 2달 반을 넘게 활보하는 세상이 되었다.

9월 23일 UN군이 논산을 탈환하고 미군 제25사단이 논산에서 대전으로 진격하면서 공주를 거치지 않아 인민군 잔류자들이 계룡산무성산 일대에서 며칠 더 활동하였으나 10월 초순경에는 퇴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공주에서의 6·25전쟁은 10월 초순 무렵에 이미 끝나 치안 상태는 평온을 되찾았으나 한동안 전쟁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기는 어려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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