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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869
한자 文周王
영어음역 Munjuwang
영어의미역 King Munju
이칭/별칭 모도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서정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성별
몰년 477년연표보기

[정의]

삼국시대 백제의 제22대 왕.

[가계]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문주왕개로왕의 아들이라고 되어있지만 개로왕이 통치할 때 상좌평(上佐平)이 되어 통치를 도운 것을 보면 동생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실제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문주왕개로왕의 동생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문주왕개로왕의 동생이면서 다 같이 제20대 비유왕(毗有王)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활동사항]

문주왕(汶洲王, 文州王)[재위 475~477]은 원래 개로왕을 보좌하며 최고 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을 역임하였는데, 475년(개로왕 21) 9월에 고구려가 침입해 와 한성(漢城)을 포위하자 동맹국인 신라에 구원 군을 청하러 파견되었다. 그러나 문주왕이 군사 1만을 얻어 한성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성은 파괴되고 개로왕은 살해된 뒤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위에 오른 문주왕은 곧바로 10월에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웅진 천도 이후 왕실과 해씨(解氏), 진씨(眞氏) 등의 부여족 계통 구 귀족들이 금강유역에 정착하면서 이곳에 토대를 두고 있던 마한계의 토착 세력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아울러 왕실과 부여족 계통의 구 귀족들 간의 갈등도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개로왕의 패사와 그에 따른 웅진 천도로 왕실의 권위는 크게 떨어지고, 그와 더불어 그 동안 왕실의 권위에 눌려있던 구 귀족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문주왕해구(解仇)를 병관좌평에 임명하는 것으로 혼란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에 임명함으로써 귀족들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동생 곤지가 죽음으로써 해구의 전횡을 지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드디어 477년 9월 사냥 나갔다가 해구가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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