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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지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459
한자 目支國
영어음역 Mokjiguk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
집필자 강종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소국
관련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지(三國志)』|『후한서(後漢書)』

[정의]

삼한시대 마한의 54개 소국(小國) 중 하나.

[개설]

목지국(目支國)은 초기 철기시대 이래 충청남도와 전라남도·전라북도 지역에서 형성, 발전되어 온 토착 정치 집단의 하나로, 백제(百濟)가 마한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기 전까지 마한 소국 연맹체의 중심 세력이었다. 『삼국지(三國志)』위지 동이전에는 월지국(月支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목지국의 존속 시기 및 진왕(辰王)의 지배 영역과 지배 성격에 대해서도 해석이 다양하다. 목지국 진왕은 삼한 전체를 통솔한 지배자라는 해석과 부족 연맹장으로서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존재라는 해석, 3세기경의 백제 고이왕(古爾王)과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목지국 진왕의 진한·변한 소국 지배에 관한 기록에 대해서도, 이를 중국 군현(郡縣)에 근접한 한(韓) 소국과 멀리 떨어진 소국 사이에 형성된 공납 관계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중국 군현과의 교역 과정에서 경상도 방면의 일부 정치 집단들에 대하여 확립된, 마한 소국의 우월한 위치가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형성 및 변천]

목지국은 마한을 포함한 삼한을 대표하는 맹주국으로, 성립 시기는 기원전 4세기로부터 기원 전후한 시점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목지국의 신지(臣智)인 진왕은 마한 소국 연맹체의 맹주로서 진한·변한 소국의 일부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지만 스스로의 의사로 마한 소국 연맹체의 연맹장이 될 수는 없는, 정치권력이 아직 미약한 지배자였다.

목지국의 멸망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목지국의 쇠퇴는 군현 세력의 변동과 백제의 성장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조(韓條)에는 한(韓) 세력과 중국 군현 세력과의 충돌 내용과 함께 한이 멸망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은 246년(고이왕 13) 일어난 백제와 중국 군현의 충돌로 이해되기도 하며, 중국 군현 세력이 한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백제에 의해 목지국 세력이 병합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 온조왕 26년조에는 백제가 사냥을 한다고 하면서 마한을 공격하여 복속시킨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마한은 마한 연맹체의 맹주국인 목지국으로 그 병합 시기는 고이왕 대로 추정된다. 목지국의 명칭이 3세기 중엽 이후부터 보이지 않는 점도 그러한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위치비정/행정구역상의 구분]

목지국의 위치는 인천, 한강 유역의 위례성(慰禮城), 충청남도 직산(稷山), 예산, 아산만 일대, 천안 등지에 비정되기도 하고,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비교적 풍부하게 발견되는 전라북도 익산, 금강 유역, 나주를 중심으로 한 영산강 유역 등지에 비정되기도 한다.

또한, 목지국은 백제의 성장에 따라 그 중심지가 천안·직산 일대에서 나주 반남면으로 이동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는 고조선 준왕(準王)의 남주(南走) 기록이나 청동기 유물 및 고분군의 분포 상태 등을 서로 다른 기준으로 상호 결합하여 제시된 견해들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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