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B02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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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갑표 |
[민족의 기운이 서려 있던 곳]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명월관 부속 건물인 태화관[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2층의 동쪽 끝방에서 민족 대표 서른세 명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다.
태화관은 조선왕조의 인조가 즉위하기 전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이후 안동김씨 김흥근의 저택이었다가, 헌종의 후궁 김씨가 머물던 순화궁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인 1905년 을사조약 때는 매국 대신들의 나라를 파는 모의 장소로 이용되었고, 1907년에는 친일파 이완용의 집터가 된다.
이완용은 여기서 5년쯤 살다가 명월관 주인에게 집을 빌려 준다. 그때부터 태화관은 명월관의 지점이 되었다. 1938년에는 기독교 남감리교 세계 선교부가 이곳을 매입하여 건물을 헐고 태화기독교사회관이라는 건물을 짓는다. 그러다가 1979년 재개발 바람에 헐리게 되고, 지금은 태화빌딩이 되었다. 그 오른쪽 옆 커다란 바위에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고 쓰여 있다. 태화빌딩 1층 로비에는 3·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민족 대표들의 그림이 걸려 있고, 그 옆에는 ‘독립 만세’라고 쓰인 백범 김구 선생님의 친필이 걸려 있다.
3·1독립만세운동 또는 기미독립운동은 민족 대표 서른세 명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함으로써 시작됐다.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의 폭압적 식민 지배에 저항하며 들불처럼 일어난 우리 민족의 해방 운동이다.
그런데 이렇게 민족과 독립, 3·1운동의 역사성이 깊은 공간이 헐리게 되자, 동심원장 송재욱 씨는 결단을 내리고 태화관의 주춧돌[건축물의 기둥을 받쳐 주는 돌]과 기와, 목재 등을 사들여 지금의 동심원으로 옮겨 온다.
[역사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5톤짜리 트럭으로 7대 분을 동심원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복원할 계획이었지만, 법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동심원의 터가 문화재보호구역이었던 탓에 건축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두 번에 걸쳐 복원을 시도할 때마다 관할 행정 기관과 충돌이 빚어졌고, 결국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독립운동이란 역사성이 없었다면 이 주춧돌은 다른 평범한 돌들과 무엇이 다를까? 현재 이곳으로 옮겨진 목재는 다 썩어서 파묻었고, 주춧돌과 기왓장들만 동심원 한쪽에 쌓여 있다. 주춧돌이 놓여 있는 사이사이로는 여러 가지 풀꽃들이 피어 있다. 때를 기다리는 것일까? 태화관의 주춧돌은 이곳 동심원에서 무엇을 위한 주춧돌이 될까? 온 인류에게 꿈과 희망을 가져오는 또 하나의 주춧돌이 될까? 주춧돌과 깨어진 기왓장들을 바라보며 역사의 숨결과 3·1독립만세운동의 열기를 상상해 본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