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B010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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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갑표 |
[영화 속 풍경이 자리한 그곳]
동곡마을 주변에는 모악산을 중심으로 금산사·귀신사·대원사 등의 불교 사찰과 증산교를 비롯한 각종 신흥 종교 단체들, 그리고 개신교의 금산교회와 천주교 수류성당, 원불교 원평교당, 그리고 동학혁명의 구미란 전적지 등 종교와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어느 날 문득 지난날의 기억 속으로 걷고 싶거나,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 지친 삶을 위로받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싶으면 동곡마을을 중심으로 구성산과 제비산 자락 일대를 걸어 보라.
이 땅에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아직 남아 있을까? 영화보다 아름다운 풍경이 거기에 있다.
마을 주변을 따라 폭이 넓지 않은 냇가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주변의 다종교가 함께 공존하는 공간은 한 폭의 영화가 아닌 실제 존재하면서도 마치 꿈결처럼 아늑하다. 정말 동화 같다는 말밖에는 달리 그곳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 신비함을 느낄 수 있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의 배경이기도 했고, 영화 「보리울의 여름」의 촬영 무대가 되기도 했던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믿음이 돌아온다는 귀신사]
전주에서 원평으로 가는 지방도 712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김제시가 시작되는 푯말이 보인다.
벚꽃나무가 아름답게 펼쳐진 고갯길을 지나서 내리막길에 왼쪽으로 유각마을이 있고, 오른쪽으로 마을을 감싸고 있는 감나무들이 보이는 곳이 청도리다. 마을 입구에는 귀신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귀신사는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의상대사가 건립했다고 전한다.
국신사(國信寺), 귀신사(鬼神寺), 구순사(狗脣寺) 또는 귀신사(歸信寺) 등으로 불린 때도 있었는데, 각각의 이름이 어느 시기에 불렸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은 귀신사(歸信寺)로 불리고 있다. 믿음이 돌아온다니?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에서는 귀신사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귀신사는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이다.”
이 귀신사의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보라. 혹시 바람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은가?
[다종교의 유적지 같은 곳]
귀신사에서 계속 원평 방향으로 가다 보면 왼쪽으로 모악산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난 길에 한옥으로 지어진 개신교 금산교회당[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90-1번지] 지붕의 우아한 곡선이 아름답게 보인다.
교회당 안은 구조가 특이하게 ㄱ자로 되어 있는데, 이는 한쪽은 남자석, 다른 한쪽은 여자석으로 나누기 위한 구조 때문이라고 한다. 한때는 더 철저하게 남녀의 좌석을 가리기 위해 틈새가 나는 중간에 흰 포장을 쳤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전통 사회의 관습을 해치지 않으려는 이유 때문인데, 초기 교회 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ㄱ자 교회당은 다른 지역에도 있지만,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둥 하나, 서까래 하나 상하지 않고 원형대로 잘 보존된 곳은 금산교회가 거의 유일하다. 이 때문에 금산교회는 1997년 7월 18일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금산교회 바로 뒤쪽에는 증산교본부 용화도장이 있다. 여기서 원평 쪽으로 가는 길에는 금산여관이란 간판이 보인다.
골목 안으로 100m쯤 들어가면 오른쪽 기둥에 한문으로 ‘金山旅館’이라는 작은 간판이 달려 있다. 들어가 보면 1960년대의 영화 세트장 같은 모습으로 옛 여관이 서 있다.
여기에서 돌아 나와 원평 쪽으로 가면 동곡마을이 나온다. 이 길을 잠시 미루고 왼쪽으로 난 새로운 길을 따라가면 천주교 수류성당[김제시 금산면 화율리 223번지]이 나온다. 화율리마을은 한때 300여 가구가 살았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수류성당 신자들이었다.
수류성당은 원래 1895년에 목조 건물로 지어졌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탔으며, 지금의 성당 건물은 1959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당시 주민들이 직접 냇가에서 모래와 자갈을 채취해 벽돌을 만들었고, 그렇게 자신들만의 성당을 다시 지었다. 지붕은 불타고 남은 옛 성당의 함석을 그대로 사용했다. 1890년대에 지어진 종탑이 아직 그대로 보존돼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종이 울린다. 성당의 풍경은 정말로 동화 같고, 그 마을은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롭다.
이곳에서 뚝길을 따라 원평 방향으로 가면 마당이 넓은 원불교 원평교당이 보인다. 이 교당은 수몰되기 전 금평저수지 안에 있었던 교당이다. 이 교당에 들어오면 입구 정면에 “우리는 하나”라는 원불교 교리탑이 보인다. 그 오른쪽으로 어린이집 시설이 있고, 마당 한가운데 종각이 있다. 그 왼쪽으로는 2층 건물의 본당이 있다.
이곳을 나와서 원평장터에 이르면 1893년 동학교도 1만여 명이 모여서 교조신원과 반외세를 외쳤다는 금구·원평집회 당시의 함성을 상상하게 된다.
원평장터를 지나면 나오는 구미란마을의 뒷산[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산3번지 일대]에는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전투지였던 전적지가 있다.
구미란은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이 1894년 11월 25일 관군과 일본군을 맞아 마지막 결전을 벌였던 곳이다.
구미란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이곳에는 동학농민군들이 수없이 묻혀 있다고 전한다. 현재 마을 뒷산 소나무 숲 사이로 무명 농민군의 작은 봉분들이 수십 개 남아 있고, 원평의 학수재라는 곳의 부지 내에는 김덕령의 추모비와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각이 세워져 있다.
다시 금평저수지로 방향으로 올라오면 오른쪽으로 증산교의 창시자 강증산[본명 강일순] 부부의 무덤이 있는 증산법종교 본부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 저수지가 끝나는 지점에 환희교(歡喜橋)라는 다리를 건너서 직진하면 금산사와 전주 방향이고, 왼쪽으로 들어가면 동곡마을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