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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006
한자 近代實學-大家-石亭李定稷
영어의미역 The Great Authority of Modern Silhak, Seokjeong Yi Jeongjik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206[요교길 187]지도보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나종우

[개설]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에서 태어난 근세 실학의 대가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은 근대 성리학자로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김제 지역의 학풍과 학통을 크게 형성한 대학자로 수많은 제자를 길러 냈으며, 그 학문적 영향력이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천재적인, 너무나 천재적인 어린 시절]

석정 이정직은 1841년(헌종 7)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일명 여꾸다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신평으로 조선시대 이조판서를 지낸 이상원의 후예이다. 석정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4세쯤에 이미 『천자문(千字文)』을 읽었고, 하루에 한자를 수백 자씩 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석정의 아버지는 석정의 지혜가 너무 일찍 드러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해서 9세가 되었을 때야 서당에 입학시켰다. 늦은 나이에 입학했지만 석정은 서당에 입학하던 해에 벌써 『자치통감(自治通鑑)』 15권을, 10세에는 『맹자(孟子)』 7권을, 이듬해에는 『논어(論語)』를 글 뜻을 생각하며 읽어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석정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12세 되던 해 역학(易學)의 대가로 이름을 떨치던 강회민(姜會民)의 제자로 들어가 역학의 기초 이론을 터득하였고, 이듬해에 금구(金溝)에 사는 안정봉(安廷鳳) 밑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을 닦았다. 『대학(大學)』·『중용(中庸)』을 비롯하여 산학(算學)·예학(禮學)에 이르는 여러 학문을 두루 익히고, 실학사상에 눈 뜬 것도 바로 이때였다.

석정은 이렇게 학문적으로 크게 발전하면서 한편으로는 시와 문학 공부에도 충실하면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술수(術數)에 관한 책도 열심히 읽었다. 20세쯤 되었을 때 학문은 이미 높은 단계에 이르렀고, 빼어난 문장력과 재주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로도 석정은 학문적으로 더욱 발전하여 성리학의 대가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석정, 학문의 세계에 빠지다]

석정은 27세 되던 해 중국 연경(燕京)에 가는 사신단에 동행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연경에 머무르는 동안 동서양의 많은 책을 접하면서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을 얻어 동서 사상을 아우르는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게 된다.

중국 시문학에 대한 고증과 평론, 중국 성리학에 있어서 정주학(程朱學)과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해설과 논평, 칸트와 베이컨 등 서양 철학에 대한 연수와 동서 철학의 절충론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연구하였고, 이때 얻은 성과는 『연석산방미정문고(燕石山房未定文藁)』, 『문고(文藁)』, 『시고(詩藁)』 등 25권의 학문적 업적으로 집대성되었다.

[빼어난 인간미를 지닌 고고한 선비]

연경에서 돌아온 석정은 부모를 모시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산중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과 힘을 다하여 부모를 섬겨 효자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어찌나 가난했던지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었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석정은 훗날 전주에서 몇 해 동안 약을 팔아 번 돈으로 부모에게 못 다한 한을 갚았다.

혼자가 된 석정은 고향인 김제 요교마을로 돌아와 그의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토론하고, 자신이 기록해 두었던 글들을 정리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붓글씨와 그림 솜씨가 빼어났지만 아무리 가난해도 사고파는 일은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시나 글을 대신 짓게 되면 반드시 원본을 불에 태워 버렸다. 조정에서 관직에 나오기를 청하여도 나아가지 않았다.

의술에도 일가견이 있던 석정은 아픈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처방과 치료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돈을 받는 일은 없었다. 오로지 모든 지식을 매일 먹는 양식처럼 소중하게 생각했고, 학술을 해설하고 토론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학자의 길을 가고자 하였을 뿐이다.

석정이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인 면에서 빼어났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나서 크게 활동하지 않은 것은 성품이 맑고 깨끗하여 어지럽고 더러운 세상에 그 이름을 드러내기 싫어했고, 그 시대와 석정의 높은 뜻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실학자요, 예술가로 우뚝 서다]

19세기 중엽의 우리나라는 정치적·문화적으로 매우 어지러운 때였다. 학계에서도 서양 학문을 반대하는 보수파와 서양 학문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는 신진파의 흐름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보수파는 옛날부터 내려온 학문에만 매달려 서학(西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신진파는 개화를 인정하고 시대가 앞서 나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과학적 사고를 하기도 했다. 또 한편에서는 전통적 도학 외에는 어떤 학문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순수 도학자들이 있었고, 도학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서학의 과학적인 면을 받아들여서 동서와 신·구학의 조화를 주장하는 절충주의 학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당시 우리나라 선비들이 학문을 대하는 태도는 서로 달랐다.

석정은 전통적인 도학의 기초 위에 새로운 과학을 조화하려는 학풍을 이루었다. 여기서 한 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석정과 더불어 그 시대를 대표했던 해학(海鶴) 이기(李沂),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모두 전통적인 도학을 존중하면서도 종래의 도학처럼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굴레에서 벗어나 도학이 과학과 더불어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실용화될 수 있는 실학을 펼쳐 나갔다는 점이다.

석정은 시문학·어문학·경학·술학·예학·산학에 모두 뛰어났고, 이학(理學)은 비교적 뒤늦게 정리되었지만 『연석산방미정문고』에 실을 정도였다. 이처럼 석정은 어디까지나 실용을 위한 학문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와 관련한 많은 책을 남겼다.

주요 저술로 시문학에서 『시경주해(詩經註解)』·『시학중해』·『소여록』·『간오정선(刊誤精選)』·『소시주선(蘇詩註選)』·『석정집(石亭集)』, 성리학에서 『연석산방미정문고』가 있고, 이 밖에 어음학(語音學)·천력학(天歷學)·술수학(術數學) 등 다방면에 걸친 저술을 남겼다. 이 가운데 시문의 일부를 간추린 『석정집(石亭集)』 3권이 현재 전하고 있다.

석정의 대표적 문집인 『연석산방미정문고』에는 칸트와 베이컨의 철학에 관한 별집이 있는데 칸트를 강덕(康德), 베이컨을 배근(培根)이라고 한자로 각각 써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석정은 칸트와 베이컨 철학을 한국의 유학자로는 처음으로 들여왔고, 폭넓은 학자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동양 철학의 주자학과 서구 철학을 비교·분석해 가며 자기 나름의 철학을 펼쳐 나가는 데 중요한 다리 역할을 다하였다.

석정은 서예에 조예가 깊어 해서는 구양순체, 행서는 미불체와 동기창체, 비갈명은 안진경체를 많이 썼고, 특히 해서와 세서에 매우 뛰어났다. 그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순수 묵화로 사군자를 많이 그렸고, 괴석·산수·수목·조류·어류를 소재로 한 그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특히 「괴석도」는 필법이 매우 특이하여 당대의 으뜸으로 꼽을 만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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