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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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國 戰爭 |
영어공식명칭 | Korean War |
이칭/별칭 | 6·25 사변,6·25 전쟁,한국 동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은정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50년 6월 25일 - 한국 전쟁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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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950년 6월 26일 - 한국 전쟁, 유엔군 개입 |
전개 시기/일시 | 1950년 6월 27일 - 한국 전쟁, 북한군 서울 점령 |
전개 시기/일시 | 1950년 7월 14일 - 한국 전쟁,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유엔군에 이양 |
전개 시기/일시 | 1950년 7월 25일 - 한국 전쟁, 경상남도 거창군 바리기재에서 경찰과 북한군 전투 |
전개 시기/일시 | 1950년 7월 26일 - 한국 전쟁, 육군 제7사단 휘하 4개 부대와 미군 제19연대가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서 북한군 제4사단과 전투 |
전개 시기/일시 | 1950년 7월 27일 - 한국 전쟁, 북한군이 경상남도 거창군으로 진격 |
전개 시기/일시 | 1950년 7월 하순 - 한국 전쟁, 북한군이 낙동강 이남 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역 점령 |
전개 시기/일시 | 1950년 8월 말 - 한국 전쟁, B-29 편대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시가지 폭격 |
전개 시기/일시 | 1950년 9월 15일 - 한국 전쟁,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전세 역전 |
전개 시기/일시 | 1950년 9월 26일 - 한국 전쟁,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는 북한군 패잔병 부대가 경상남도 거창군 통과 |
전개 시기/일시 | 1950년 9월 28일 - 한국 전쟁, 서울 수복 |
전개 시기/일시 | 1950년 9월 29일 - 한국 전쟁,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결성 |
전개 시기/일시 | 1950년 10월 25일 - 한국 전쟁, 중국군 참전 |
전개 시기/일시 | 1951년 7월 10일 - 한국 전쟁, 휴전 회담 시작 |
전개 시기/일시 | 1953년 7월 27일 - 한국 전쟁, 유엔군과 중국군, 북한군이 휴전 협정에 서명 |
종결 시기/일시 | 1953년 7월 27일 - 한국 전쟁 휴전 협정 체결 |
발생|시작 장소 | 38선 - 북위 38도선 일대 |
종결 장소 | 판문점 -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일대 |
성격 | 전쟁 |
관련 인물/단체 | 대한민국|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중화 인민 공화국|미국|유엔|이승만|김일성|스탈린|모택동|맥아더 |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경상남도 거창군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 분단과 냉전 체제가 성립되고 1948년 8월 15일 남북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다. 1950년 1월 애치슨 선언이 발표되고 1950년 4월 소련이 북한의 전쟁 승인과 비상시 중국의 참전을 요구하였으며, 1950년 5월 중국이 참전을 약속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이 38선 이남으로 불법 침략하여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1950년 6월 26일 유엔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의하였다. 1950년 6월 27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였으며, 1950년 7월 14일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유엔군에 이양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으로 한국 전쟁은 휴전되었다.
경상남도 거창군 지역은 한국 전쟁 발발 한 달 뒤인 1950년 7월 27일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다가 두 달만인 1950년 9월 27일 수복되었다. 한국 전쟁은 거창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북한군이 거창 지역으로 들어오기 전인 7월 말경에 거창 경찰이 거창 지역의 국민 보도 연맹원들을 집단 학살하였다. 또한 지리산 지역 빨치산 토벌 작전 중에 국군 제11사단에게 민간인 719명이 희생된 ‘신원 양민 학살 사건’ 등이 일어났다.
[역사적 배경]
덕유산 자락에 자리 잡은 경상남도 거창군은 해방 뒤 좌익과 우익의 갈등 속에 충돌을 겪다가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자 좌익 야산대(野山隊)[미군정 시기에 남조선 노동당이 만든 무장 조직]의 활동 지역이 되었다. 1948년 10월 여순 사건의 반란군은 토벌을 피해 지리산과 덕유산으로 이동해 왔다. 지리산과 덕유산은 이현상이 지휘하는 남부군의 주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이후 거창 지역은 빈번하게 야산대에게 공격받았다. 또한 지리산과 덕유산에 근거를 둔 약 500명의 여순 사건 반란군 김지회 부대는 경상남도 하동군·산청군·함양군·거창군에 빈번히 출몰하여 면사무소나 경찰 지서를 습격하였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거창 지역은 또 다시 좌우익의 충돌 지역이 되었고, 빨치산 토벌 과정 중에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다.
[경과]
한국 전쟁 당시 거창 지역에서 벌어진 첫 전투는 1950년 7월 25일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과 안의면의 경계인 바리기재에서 경찰과 북한군의 접전이였다. 1950년 7월 26일 육군 제7사단 휘하 4개 부대와 미군 제19연대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서 북한군 제4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경상남도 거창군으로 후퇴하였다. 1950년 7월 27일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을 점령한 북한군이 경상남도 거창군으로 진격하자 미군 제34연대가 방어하였지만 경상남도 합천군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미군은 후퇴하면서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거창교와 이월교 등을 폭파하고, 도로를 파괴하였다. 경찰 및 기타 부대도 지휘 체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흩어져 경상남도 합천군 등지로 철수했다.
북한군은 선발대에 이어 1950년 7월 말 전라도 방면에서 대부대가 들어와 경상남도 거창군을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으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경상남도 거창군은 북한군 점령지가 되었다. 북한군은 점령 기간 동안 인민 위원회, 내무서, 청년 동맹, 부녀 동맹 등을 조직하였고, 2천 평 이상의 토지를 몰수하는 토지 개혁도 단행하였다. 미처 피난 가지 못한 공무원, 우익계 인사들은 북한 인민군에게 고초를 겪었다. 청소년은 의용군으로, 장년은 군수 물자 운반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1950년 8월 말경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시가지에 B-29 편대의 대폭격이 있었다. 매일 제트기가 상공을 제압하여 교량 폭파 등을 하니 거창 지역은 주야로 불안정한 정국이었으며, 주민들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0년 9월 26일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는 북한군의 패잔병 부대가 거창 지역을 통과하기 시작하였고, 그 뒤를 쫓는 연합군이 거창 지역을 수복하였다.
북한군이 퇴각하였지만 빨치산의 출몰과 군경의 토벌 작전으로 거창 지역은 여전히 불안한 정국이었다.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 낙오병과 북한군의 점령에 협조했던 사람들은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여 입산하였다. 1950년 9월 29일 결성된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가운데 거창 중대도 구성되어 있었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1950년 12월 초 국군은 빨치산 토벌에 주력하였다. 이 동계 대토벌로 거창 지역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의 활동도 쇠퇴해 갔다. 빨치산의 토벌 과정에서 거창 주민들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고, 그 중에서 가장 큰 규모가 국군 제11사단에 의해 벌어진 719명이 희생된 신원 양민 학살 사건이다.
[결과]
한국 전쟁은 대규모 인명 피해를 낳았다. 당시 남북한 인구 3천만 명의 6분의 1에 달하는 5백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중국군과 유엔군을 합치면 6백만 명에 이른다. 한국 전쟁의 비극성은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거나 다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남한의 경우 전체 사상자 2백만 명의 50%인 1백만 명이 민간인 사상자였다. 북한은 무려 전체 사상자 3백만 명의 80%인 250만 명이 민간인이었다.
전선이 계속 이동하고 교차되는 상황에서 모든 주민들은 남북 양측에게 처벌을 받는 존재로 변했다. 민간인 학살은 전쟁 최대 비극이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일어난 신원 양민 학살 사건이다. 학살은 군인과 경찰 등 공권력에 의해 주도되었고, 사적 보복도 공권력의 실질적인 묵인 하에 이루어졌다. 그 외 인명 피해로는 약 천만 명 규모의 이산 가족이 발생하였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한국 전쟁은 대규모 경제적 피해를 가져 왔다. 공장과 기업소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 시설인 관개 시설과 제방, 저수지 등이 파괴되었다. 또한 주택, 학교, 병원, 극장, 도서관 등도 파괴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미국과 일본에게는 경제적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해방 후의 일시적 남북 분단은 한국 전쟁으로 완전히 고착화되었다. 또한 민족 내부의 불신과 적대감은 전쟁으로 더욱 공고화되었다. 남과 북 모두 상대방을 맹비난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고, 합리적이고 타협할 수 있는 세력이 성장할 수 없었다.
또한 남북 모두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고 말았다. 남한은 반공 주의가 국가의 최고 국시가 되어 다른 민주적 가치들에 우선하였다. 이승만은 권력 연장을 위해 국회 의원을 구속하고 ‘사사오입’으로 대통령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무정 등 연안계, 허가이 등 소련계, 박헌영과 이승엽 등 남조선 노동당 출신들이 숙청되었다.
[의의와 평가]
한국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중국군, 북한군의 휴전 협정 서명으로 ‘전투’는 종료되었으나, ‘전쟁’은 종료되지 않았다. 휴전 협정 과정에서 배제된 한국은 오늘날에도 한반도 안보 문제에서 주체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며,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여전히 전쟁 중이라는 사실은 종전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한민족 모두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