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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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啓禧 |
이칭/별칭 | 순보(純甫),담와(淡窩),문간(文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상배 |
[정의]
조선 후기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광주 일대를 관할했던 광주유수를 지낸 문신.
[개설]
영조 때의 문신으로 노론계 핵심인물로 활약했으며, 균역법(均役法) 시행에 앞장 서는 등 시무에 밝은 관료였다. 영조의 아들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이며, 정조 때 관작을 추탈당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강남구 일대를 다스렸던 광주유수를 지낸 인물이다.
[가계]
홍계희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순보(純甫), 호는 담와(淡窩)이다. 아버지는 참판 홍우전(洪禹傳)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이상(李翔)의 딸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활동 사항]
1737년(영조 13) 별시 문과에 장원한 후 정언(正言)·교리(校理)·수찬(修撰)을 거쳐 1742년 북도 감진어사로 나가 공을 세웠고, 이듬해 북도 별견어사를 역임하며 그 지역의 지형과 물정을 상세히 기록한 지도를 작성하여 올렸다. 1743년에는 소론(少論)의 박문수(朴文秀)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혐의로 탄핵하였다가 오히려 당색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삭직(削職)되었다. 이듬해 승지(承旨)로 복직되어 1748년 통신 정사로 일본에 다녀와 형조참판으로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하였다. 1750년 병조 판서에 올라 균역법을 실시하는데 앞장서 『균역사목(均役事目)』을 작성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이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1753년 광주유수(廣州留守), 이듬해 이조판서에 올랐다. 이후 형조·병조·호조의 판서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며, 판중추부사로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삼운성휘(三韻聲彙)』가 있고, 편저로는 『균역사실(均役事實)』·『준천사실(濬川事實)』·『균역사목변통사의(均役事目變通事宜)』·『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해동악장(海東樂章)』·『명사강목(明史綱目)』·『경세지장(經世指掌)』·『문산선생상전(文山先生詳傳)』·『주문공선생행궁편전주차(朱文公先生行宮便殿奏箚)』·『사곡록(寺谷錄)』·『창상록(滄桑錄)』 등이 있다.
[묘소]
홍계희는 아들이 근무하던 영변(寧邊)에서 사망했으며,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곡현로 847번길 17-8[일산리 산 2-1]에 있다. 1992년 10월 12일 용인시 향토유적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1777년(정조 1) 관작이 추탈되고 역안(逆案)에 이름이 올랐다가 1864년(고종 1) 관작이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