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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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안창모 |
[정의]
1967년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영동1지구와 영동2지구 사업이 시작되면서 개발이 본격화되어 88올림픽을 계기로 완성된 서울특별시 강남 지역.
[개설]
1963년 서울의 행정구역 확장이후 제시되었던 대서울계획이 실천에 옮겨지지 않았으나, 1967년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1968년 1.21사태를 계기로 영동1지구와 영동2지구 사업이 시작되면서 강남개발이 본격화되어 88올림픽을 계기로 완성되었다. 강남개발은 도성 안에 집중되었던 입법, 사법, 행정의 기능을 국회는 여의도, 입법은 강남으로 분산시킴에 따라 서울의 공간구조를 재편하는 기회가 되었다.
[서울 시역의 변화와 강남]
1936년 4월 1일 서울의 행정구역에 처음으로 한강 이남에 위치한 영등포 일대가 시역에 포함되었고, 당시 서울 인구는 63만명에 달했다. 이후 1949년에도 134.413㎢의 면적이 서울시에 추가로 편입되었으나 이때는 한강 이남 지역은 추가되지 않았다. 1949년 시역 확장 당시 목표 인구는 200만명이었다. 그러나 1960년에 서울 인구가 200만을 돌파하자, 1963년 500만명 수용을 전제로 시역 확장이 다시 이루어졌다. 서울시에 인접한 경기도의 12개면 90개 리가 편입되어 서울시 면적은 268.35㎢에 328.15㎢이 편입되어 596.50㎢이 되었는데, 실제 면적은 조정을 거쳐 건설부 고시에 따라 613.04㎢가 되었다. 오늘날 서울 시역의 윤곽이 이때 형성되었다.
확장된 서울의 도시구조는 도심을 중심으로 동심원적 도시형태를 기본형으로 하여 지역의 성격과 기능을 동심원 환상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즉, 도심인 구시가지는 상업, 업무, 문화시설 등 각종 서비스 기관을 중심으로 한 중심업무와 상업지구로 설정되었으며, 은평, 숭인, 구로, 뚝섬 지구 등 4개 지구는 중소규모의 산업시설과 배후주택지, 주민의 일상생활편리를 위한 소비, 후생시설이 마련되고, 신편입지인 강남 일원은 교외지역으로 단독주택을 위주로 한 주택지로서 커뮤니티를 위한 생활시설과 대학 또는 기타 연구기관이 자리 잡도록 계획되었다. 강남 일원으로 서울시역을 확장하면서 강남에 유치할 계획이었던 단국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 등이 이전계획을 수립된 적이 있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 않았으며, 결국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만 이전되었다.
이 때 확장된 시역에 따라 영등포에 한정되었던 한강 이남 지역이 오늘의 강남 영역까지 확대되면서 서울은 처음으로 한강 전체를 품에 안는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시역의 대폭 확장에도 불구하고 1970년에 이르기까지 한강 이남은 시가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1963년의 행정구역 확대는 행정적인 의미만 지닐 뿐 도시적 기능의 확대와 도시구조 재편과는 무관했다.
[강남개발의 배경]
강남개발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으로 인해 가속화되었다. 1963년에 발표되었던 ‘대서울도시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고, 1967년 12월에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이 확정 발표되었으나 그 안에는 강남 일원에 대한 구체적인 개발계획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데 1968년 1월 21일에 발생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인해 사정이 달라졌다. 1969년 대통령이 표방한 ‘싸우며 건설하는 해’에 맞추어 김현옥 시장이 ‘서울요새화계획’과 ‘방어 및 관광목적의 스카이웨이’ 건설계획을 발표하였고, 이어서 1969년 12월에 한강 남쪽에 ‘제2서울’건설 계획이 발표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강남’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으며, 강남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영등포의 동쪽’에 위치한다는 의미를 담은 ‘영동’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최초의 강남개발지에 붙여진 이름이 ‘영동1지구’와 ‘영동2지구’ 개발이었다. 그러나 영동1지구는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고속도로 인접지역 개발을 위한 것이었기에 강남개발과 거리가 있었다. 강남개발이 본격화된 것은 영동2지구 개발부터다.
[영동에서 강남으로]
영동지구 개발을 통해서 강남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1975년 행정적으로 성동구에 소속되었던 한강 이남 지역이 강남구로 독립되면서 비로소 강남이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강남구에서 서초구와 송파구가 분리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강남보다는 영동이라는 단어가 폭넓게 사용되었으며 동시에 남서울이라는 이름도 널리 사용되었다. 1988올림픽의 서울 개최가 이루어지기 전에 공사가 시작되었던 ‘잠실종합운동장’의 이름이 ‘남서울운동장’이었다는 사실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1976년 9월 22일 건립계획이 발표되면서 ‘잠실종합경기장’이었던 첫 이름이 11월 18일 실내체육관 설계변경을 발표 때는 ‘서울대운동장’으로 되었다가 결국 ‘남서울운동장’으로 바뀌었고, 88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올림픽 주경기장’이 되었다. 지금은 잠실종합운동장으로 불린다. 이는 한강 이남이 서울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된 지 15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강남의 정체성이 취약하여 여전히 한강 북쪽이 서울이라는 인식이 널리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남개발이 한창이던 시절에 강남을 지칭하는 이름이 남서울 또는 영동이었다는 사실은 강남을 인식하는 기준점은 강북의 구도심과 한강 이남의 영등포였음을 알 수 있다.
영동2지구 개발을 통해 강남개발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지만, 이 계획은 서울의 구도심인 4대문 안을 중심으로 강남 일원을 주거기능 중심으로 조성하는 계획이었다. 초기에는 상공부[현 기획재정부]가 이전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 않아 도시기능의 배분을 통한 다핵도시화의 의지는 없는 도시계획안이었다. 이는 한강 이남의 시역 편입이 도시구조 개편차원이 아니라 인구급증에 따른 택지 확보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 이북에 국가기능 모두가 집중되어 있어, 강북은 입지적으로 강북을 너머 그 자체로 서울을 대표하고 있었다.
이러한 강남의 도시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 것은 88서울올림픽을 개최하면서이다. 88올림픽 개최는 한강을 중심으로 강남과 강북의 도시구조를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고, 지지부진하던 강남의 중심가로인 테헤란로가 업무중심가로 개발되고 강남대로가 강남과 강북의 중심을 연결시켰으며, 서초구에 사법부가 옮겨오면서, 여의도의 국회와 함께 국가 기능의 도시구조적 분산이 완성되었다. 서울도시철도 1호선과 X자형으로 건설될 예정이었던 서울도시철도 2호선이 순환선으로 건설되면서 강남개발이 촉진되었고, 잠실역과 강남역 그리고 사당역을 중심으로 하는 강남의 새로운 중심이 형성되면서 오늘날 강남의 도시구조와 도시경관이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