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1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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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國-統一村-유곡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혜윤 |
[정의]
강원도 철원군에 건설된 14개 민북마을 중 가장 파격적인 지원 하에 조성된 통일촌 유곡리의 어제와 오늘.
[철원군 민북마을 탄생과 변천]
1953년 전쟁은 끝났지만 철원 지역 주민들은 고향마을로 들어갈 수 없었다. 고향마을에 휴전선이 그어지고 DMZ[비무장지대]와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이 설정되었다. 수복 초기에는 미군정이 새롭게 건설한 민통선 밖 정착촌 막사에 머물며 일일 출입 허가를 받아 자기 농토에 들어갈 수 있었다. 농번기에는 출입 시간을 연장하라는 주민들 요구가 빈번하였고, 군부대는 작전상 불가하다고 맞섰다. 안보가 최우선인 1960~1970년대에는 주민과 관공서가 관할 부대장의 눈치만 보았다. 어떤 이는 자기 논에 조금이라도 물을 더 댈 욕심에 몰래 움막을 짓고 논에서 목숨 걸고 밤을 지새웠다. 전쟁의 상흔이 가라앉고 체제가 안정되면서 주민들의 고향마을 입주에 대한 열망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정부는 휴전선 인근 수많은 황무지와 유휴지를 개척하여 농지 확장은 물론 식량 증산이라는 과업을 완수하고, 첨예한 남북 대치 상황에서 국가 안보 체제도 강화하고 대북 심리전에서 우위를 확보할 목적으로 민북마을[선전마을]을 건설하게 된다.
민북마을은 일반적으로 전략촌이라고 통칭되는데 실제로는 입주 배경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다르다. 그 명칭으로는 초창기 자립안정촌과 이후에 가장 많이 건설된 재건촌, 박정희 대통령 집권 후반기에 파주 대성동과 철원 유곡리 두 곳에만 시범적으로 건설된 통일촌 등이 있다. 민북마을이 크게 3부류로 구분되는 기준은 조성 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마을 조성 과정에 정부가 얼마나 깊숙이 주도적으로 개입하였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철원군에서는 1959년 철원읍 월하리 72세대를 필두로, 1960년 관전리 32세대, 1968년 철원읍 대마1리 150세대, 대마2리 97세대, 1970년 김화읍 생창리 100세대. 1973년 김화읍 유곡리 60세대, 1974년 갈말읍 동막리 50세대, 정연리 120세대, 1979년 동송읍 이길리 68세대, 양지리 100세대, 1960년 근남면 마현1리 66세대, 1968년 마현2리 60세대 등 총 14개 민북마을을 조성하여 975세대를 입주시켰다. 그러나 입주 초기 너무 근시안적으로 공사하여 1970년대 후반 대대적으로 보수한다. 1979년 민북 지구 취락 구조 개선 사업이 완수되면서 민북마을은 ‘전쟁의 상처를 딛고 새롭게 도약하는 문화촌’이라 불릴 정도로 발전한다.
그러나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민북마을도 커다란 시련기를 맞고 있다. 개척정신으로 무장하였던 입주 1세대들은 절반 이상이 별세하였고, 2세대들은 농가 소득 저하로 고전하고 있다. 이농현상 심화로 마을 인구는 격감하였고 급격한 노령화로 노동력이 부족하다. 마을에 아기 울음소리가 그친 지 이미 오래되었고 마을 초등학교는 폐교되었다. 빈집이 늘고 폐가가 방치되어 황량함마저 감돈다. 입주 초기 아무도 찾지 않던 황무지를 목숨 걸고 개간하여 문전옥답으로 만들어 놓았더니 어느 날 불쑥 땅 임자라고 나타나 마을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사유재산권 문제라며 적극 개입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땅을 빼앗기는 일이 속출하였고 2004년 전방을 휩쓴 부동산 광풍은 사태 해결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최근 DMZ 활용 문제로 대내외적인 환경이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는데도 그 중심부에 있는 민북마을은 아직 고요하다.
[통일촌 유곡리 마을 소개]
유곡리(楡谷里)는 근북면 남쪽 지역, 김화읍 북쪽 지역의 민통선 안에 있는 벼농사 중심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며, 일부는 휴전선 남방한계선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동쪽으로는 성재산(城劑山)과 남쪽으로는 안암산(鞍岩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는 지암분지(芝巖盆地)가 펼쳐진다. 마을 내 두 개의 소하천이 남에서 북쪽의 비무장지대 내로 흘러들어 이북 지역에서 남으로 흐르는 하천과 합류하여 다시 남서쪽으로 흘러 김화 화강으로 유입되는 유곡천이 있다. 유곡리 주변은 성재산맥을 따라 동남쪽으로 김화읍 읍내리와 동북쪽으로 비무장지대인 근북면 금곡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남쪽으로 안암산맥을 경계로 김화읍 도창리, 북쪽으로 비무장지대 내 유곡천을 따라 근북면 백덕리와 접하는 등 4개 법정리와 경계를 이룬다. 유곡리 총면적은 876만 2998㎡[2006년 12월 31일 현재]로 농경지 329만 4,863㎡[37.6%], 임야 506만 5965㎡[57.8%], 기타 40만 2170㎡[4.6%]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의 주 교통로는 군도2호선으로 지방도 제464호의 도창리에서 시작하여 마을로 통하고 성주골을 지나 읍내리의 국도 제43호와 연결되나 읍내리부터 성주골 구간은 군작전상 주민의 통행이 제한되고 있다. 특산물로는 현무암 지대의 비옥하고 청정한 농경지에서 주로 쌀을 생산하고 있고, 시설하우스를 이용한 원예를 하거나 고추, 토마토, 오이를 재배하고 있다.
1973년 7월 30일 경기도 파주 통일촌과 같은 날 동시에 입주한 유곡리는 파주 통일촌 80세대보다 20세대가 적은 60세대로 구성되었다. 1970년대 이스라엘의 ‘키부츠’를 모방하여 만든 유곡리는 전선 방위는 물론 유휴경지 활용을 목적으로 대북한 우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건설된 선전마을 통일촌이다. 북녘 오성산이 코앞에 보이는 유곡리는 이전의 재건촌과는 달리 정부가 직접 나서 가구당 500만 원 이상의 거금을 지원할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전략적으로 만든 인공 마을이다. 당시 5군단 예하부대에서 지원자를 모집하였을 때 집과 논밭을 무상으로 6,300평[약 2만 826㎡] 분양한다기에 많은 후보자가 몰려들어 자격 심사가 까다로웠고, 선발된 사람들은 한 달 전부터 정신교육과 영농교육 등 집체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입주 초기 입주민들은 매일 저녁 군 보안부대원들의 점호를 받으며 생활하였고 군 출신과 일반 농민 출신 간에 이질감이 있어 마을 대소사를 결정하면서 심각한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1982년부터 1993년까지 시행된 「수복지역 소유자 미복구 토지의 복구등록과 보전등기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입주민들은 피땀 흘려 개간한 옥토를 모두 원소유주에게 돌려주어야만 하였다. 입주 때 정부가 인정한 경작권만 믿고 소유권 없이 개간한 토지를 두고 나중에 나타난 소유권자와 벌이는 ‘소유권 분쟁’은 크나큰 고통이다. 이런 와중에 2000년과 2005년 민북마을을 휩쓴 부동산 투기 광풍으로 유곡리 주민이 소유한 유곡리 땅은 이제 30%도 채 안 될 정도로 줄어들었다. 유곡리는 현재 민통선 안에 있으므로 군 초소를 거쳐야 출입할 수 있다.
[역사적 흐름 속에서의 유곡리 이야기-일제 강점기에서 해방까지]
일제 강점기의 유곡리 마을은 전주이씨 50여 세대의 집성촌이었다. 5~6대에 걸쳐 유곡리에 정착하여 살아왔고 현 DMZ 내 금곡에는 의연대군 묘가 있다고 한다. 유곡리에는 구성말, 중말, 안말, 새골 등 4개의 부락이 있었고, 270호가 모여 살았다. 금강산 가는 길목에 있는 유곡역이 위치하여 서쪽으로는 철원역이, 동쪽으로는 내금강으로 향하는 역이 있으며, 가까운 곳에 김화역이 있었다. 해방 이후 5년제인 유곡국민학교[유곡인민학교]가 있었고, 4칸의 교실과 교장 선생님을 비롯하여 3~4명의 선생님이 있었으며, 한 학년에 약 35명씩 전교생이 150~20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역사적 흐름 속에서의 유곡리 이야기-6·25전쟁과 피난]
6·25전쟁이 일어난 사실보다는 인민군들이 어디까지 진격하였다는 방송이 나왔고, 이후 미군의 반격, 즉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인민군 무장대들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을 이북으로 철수시켰다. 그리하여 많은 마을 사람들이 이북으로 올라갔고, 고향을 떠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산속에 숨어 있다가 유엔군과 미군의 방송을 듣고 나왔는데 며칠만 피해 있으라는 권유로 트럭에 몸을 싣고 후방으로 격리되었다.
이동한 곳은 포천시 일동면 근처로 38교 근처 하천 변이었으며, 다시 트럭을 타고 현재의 서울 광나루로 옮겨졌다고 한다. 당시 철원 사람들은 철원수용소로 가고 김화 사람들은 김화수용소로 갔다. 수용소에서는 밀가루와 양쌀로 우유죽을 먹고 살았으며, 이후 가평군 북면 일원에서 화전 밭을 일궈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고 한다.
[역사적 흐름 속에서의 유곡리 이야기-전쟁 이후 입주에 이르기까지]
전쟁이 끝나고 철원이 수복되어 청양리와 도창리에 살다가 결국 유곡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유곡리 입주할 때는 군인 출신 30세대, 민간인 30세대, 총 60세대를 선발하여 논과 밭 총 6,000여 평을 각각 나누어 받게 되었다. 또한 경운기 1대씩을 지급받았다. 이러한 조건이니 입주할 때 많은 신청인들이 모여 엄격하게 심사를 하였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사람, 결혼 안 한 사람은 자격이 되지 않았다. 최전방 지역이라 유사시 기동력을 발휘하여 적군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대상자 선발 면접을 통해 선발 기준에 맞는지 확인 후 점수가 높은 사람이 들어오게 되었다. 선발된 사람들은 철원군청에서 집중 집체교육을 받았고 예비군 훈련 받듯이 교육을 받게 되었다. 입주 후 평탄작업 및 구획 작업을 통하여 공평하게 토지를 분배받았다. 그 과정에서 입주민들은 제비뽑기를 하여 자기 농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토지문서나 소유권 확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처리되는 바람에 오늘날 토지 문제가 나오게 되었다. 수복 직후 도창리까지만 출입 영농이 이루어졌고, 유곡리는 들어올 수 없었다. 오성산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 군사전략적으로 중요한 장소라 입주가 어려웠다. 개방된 이 땅이 알려지면서 더욱 많은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유곡리 입주, 그 후 현재까지]
배정 받은 집은 다른 마을의 집에 비하여 아주 좋은 집이었다. 방 3개와 부엌, 그리고 현관과 마루가 있었다. 집의 형편은 나았으나 초창기의 생활은 매우 곤궁하였다. 장리쌀로 연명하였고, 일정 생산이 이루어지기까지 시일이 걸렸으며, 아이들이 크면서 교육비가 들어가게 되니 생활은 이전과 같이 유지되었다. 입주 초창기에는 시내버스가 없었으나 와수리로 가는 시내버스가 도창리까지 개통되고 이후 유곡리까지 연장되었다. 그러나 버스 한 대로 마을 학생들이 등하교를 하였기에 등하교 시간에는 마을 주민들은 버스를 탈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친척들이나 지인들의 방문은 승인을 받고 신분 확인이 끝나야 마을을 들어올 수 있어서 출입에 제한이 많았다. 다만 들어오면 숙박도 가능하였다. 군에 의한 통제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심하므로 사단장이 마을을 방문할 때면 건의를 하거나 하소연을 많이 하였다. 이제는 많이 완화된 편이다. 입주 초기 마을 사람들에게는 칼빈총이 배당되었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수시로 훈련을 받았다. 군인들과 함께 경계 근무도 섰고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군부대 의무대를 이용하였다. 미확인 지뢰지대가 있어 뒷산에 입산할 경우 사고도 일어나곤 하였다. 민통선 이북에 위치하다 보니 남북관계가 호전되었을 때 땅값이 조금 오르기는 하지만 지금은 전혀 미동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