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1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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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世宗大王- 講武場-江原道 第-穀倉地帶-鐵原平野開拓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규 |
[정의]
세종대왕의 강무장에서 강원도 제일의 곡창지대가 되기까지 철원평야 개척과 번영의 발자취.
[개설]
철원군은 강원도 제일의 곡창지대로서 전국 최고의 밥맛을 자랑하는 철원오대쌀을 생산하고 있다. 철원군은 경제 활동의 80%가 농업에 의존하는 농업군이고 그중 벼농사 비중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지금의 이러한 벼농사 기반이 된 것은 일제 강점기 수리조합 설립과 대대적인 철원평야 개발이다. 물론 토지 약탈과 노동력 착취, 본국 식량 조달을 위한 악랄한 식민지정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수리시설과 농경지가 남겨졌다. 조선총독부에 제출된 중앙수리조합(中央水利組合) 설립 계획서에 보면 화산 폭발로 형성된 용암대지인 철원평야는 지표면에 현무암이 많고 토질의 물빠짐이 심하여 벼농사는 적절치 않다고 적혀 있다.
한편 6·25전쟁으로 일제 강점기 건설된 기존의 수리시설은 모두 파괴되었고, 수복 후 그나마 철원평야의 젓줄이던 봉래호 저수지 물길을 북한에서 막아 버리는 바람에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이에 철원 주민들은 지역구 국회의원과 중앙정부에 전천후 저수지를 축조하여 줄 것을 강력히 건의하였다. 1967년 토교저수지 공사 기공식이 열렸고, 1978년 10여년 만에 우여곡절 끝에 준공되었다. 아울러 철원평야 경지정리 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되어 영농 기계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철원평야는 최근 100년 동안 일제 식민지와 남북 분단, 6·25전쟁과 휴전, 수복과 재건이라는 변혁기를 굳건하게 이겨낸 선조들의 불굴의 개척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강원도 제일의 농업군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철원평야의 탄생]
철원평야는 신생대 제4기[약 54만 년~12만 년 전]에 철원 북방 북한 평강 일원에 위치한 680고지와 오리산[鴨山][453m]에서 화산이 11회 이상 폭발하여 만들어진 용암대지이다. 한반도에서 한탄강(漢灘江) 일대는 백두산, 제주도, 울릉도와 함께 유년기 지층으로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땅이다. 분출된 용암이 추가령과 전곡의 고랑포 사이 낮은 골짜기를 메움으로써 철원, 평강을 중심으로 한 이천, 김화, 회양 등 5개 군 지역에 걸쳐 약 650㎢[약 1억 9,600만 평]에 이르는 광대한 뜰이 형성되었다.
철원평야는 전방 지역인 재송평(栽松坪)과 후방 지역인 대야잔평(大也盞坪)으로 구분된다. 재송평은 평강고원 남방 지대와 민통선 북방 지대[대마리, 외촌리, 강산리, 하갈리, 양지리 등]에 걸친 평균 표고 220m의 약 2만 5,000㏊ 대평원을 말한다. 면적은 대야잔평보다 2배 이상 크다. 태봉국 왕인 궁예가 재송평 풍천원(楓川原)의 싯내벌에 철원경(鐵原京)이라 도읍을 정하고 대동방국의 원대한 꿈을 이루려 하였다. 대야잔평은 동송읍 일원[이평리, 장흥리, 오덕리, 대위리 등]으로 평균 표고는 200m이고 면적은 약 1만㏊이다. 금학산과 명성산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대야잔평은 마치 커다란 잔이 놓여 있는 형상이다. 흔히 말하는 분지 지형이다. 대야잔평의 잔(盞)은 보통 술잔이 아니고 볼(bowl)보다도 밑바닥이 널찍한 대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세종의 강무장이었던 철원평야]
황무지 벌판인 대야잔평은 일명 고동주평(古東州坪)이라고도 불렸으며 궁예 때 강무장[군사 훈련장]으로 사용되었고, 조선 전기 태종과 세종이 자주 찾던 사냥터였다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전한다. 당시 한양도성에서 철원까지는 약 2~3일 정도 걸렸고, 철원에서 3~4일 정도 강무하고 다녀가려면 최소 7~10일은 도성을 비워야 하였다. 대야잔평에서 잡은 짐승은 사자(使者)를 시켜 종묘에 보내 제사 지내게 하고, 남은 것은 신하들과 병사[백성]들에게 나눠 주며 고석정(孤石亭)에서 위로연을 베풀었다.
강무(講武)는 조선 시대 왕의 친림(親臨) 아래 실시하는 군사 훈련으로서 수렵대회를 말한다. 국왕의 사냥 행위를 강무라고 한 것은 국왕의 사냥에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동원된 사람들이 일정한 명령 체계를 유지하며, 사냥을 위하여 무기를 사용함으로써 일종의 군사 훈련과 같은 성격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강무는 엄격한 의식 절차가 정해져 있었다. 강무는 국왕이 군사들을 동원하여 사냥을 통한 대규모 야외 기동 훈련이었다. 강무는 단순한 군사 훈련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강무에서 잡은 짐승을 종묘의 제사에 바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였고, 지배층이 참여하는 군사 훈련의 양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의 권위와 통치 체제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조선 전기 강무는 태종과 세종 대에 활발하게 시행되었으나 세조 대에 정지되는 경우가 많아지더니 성종 대 이후 점차 군사 훈련이라는 본래 기능이 약화되고 제물(祭物) 마련이라는 명분으로 사냥에 치중하는 경향으로 변질되어 갔으며 이후 급격하게 시행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철원이 강무장으로서 얼마나 적합한지는 『태종실록(太宗實錄)』 11권, 1406년(태종 6) 2월 20일 임금이 강무할 장소를 의논하면서 이숙번과 윤저에게 “전일에 정부(政府)에서 인주(仁州)·안산(安山)·부평(富平)·광주(廣州) 등지를 강무하는 장소로 삼도록 청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토질이 진흙이며 산과 골이 험하고 막혀서 달리고 쫓는 데 불편하고 또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어려움이 있으나, 땅이 평탄하여 달리고 쫓기에 편리함이 철원(鐵原)만 못하다. 또 철원 등지는 화곡(禾穀)이 풍년이 드니, 그 꼴짚[芻藁]을 이바지하는 데 백성들이 괴로워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철원을 선호하였다. 태종은 철원평야[대야잔평]가 물을 건너는 어려움, 즉 양안 절벽이 깊은 한탄강을 건너는 불편함은 있지만 땅이 평탄하여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기에는 철원이 가장 좋으며 말을 먹일 먹이도 풍부하여 적격이라고 말하였다.
1420년(세종 2) 2월에 경기의 광주(廣州)와 양근(楊根), 철원·안협(安峽), 강원의 평강(平康)·이천(伊川), 횡성(橫城)·진보(珍寶) 등 모두 4개 지역을 강무장으로 하고 나머지 지역은 강무장에서 해제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 안에는 전부터 거주하던 사람과 이미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 사람 이외에 오는 사람이나 새로 개간하거나 나무를 베거나 사냥하는 등 일은 일절 금하라고 명하였다. 세종 대는 거의 매년 최소한 한 차례 이상 강무가 행하여졌으며, 강무 일수는 10일 내외로 주로 강원도 철원과 평강 일대에서 행하여졌다. 세종 대에 주로 강원도 철원과 평강 등지에서 강무가 행하여진 것은 태종 대 여러 지역에서 강무가 행해짐으로써 파생된 피해를 줄이려는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수리조합 설립과 철원평야 개척]
1920년대 초 『동아일보』 보도기사를 보면 철원평야는 화산 지역 용암대지이기에 시커먼 현무암[일명 곰보돌]이 깔린 돌밭이고 대부분 황무지였다고 전한다. 천연의 못[방죽]이 있는 곳 일부와 개울이 흐르는 곳 주변을 제외하고는 벼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철원평야가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대대적인 벼농사가 가능하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1922년 철원중앙수리조합이 세워지고 철원 북방에 봉래호 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시작되었다. 1924년을 필두로 전국에서 모여든 소작인 1,500호가 철원평야 개척의 주역이었다. 물론 이는 식민지하 토지 수탈과 경제적 착취를 위한 것이었다. 드넓은 철원평야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토목 사업과 대규모 이민이 필요했다. 일제는 한반도 중앙의 화산지대 황무지를 무단으로 점령하여 전국에서 강제로 소작 이민을 강행하였다. 무자비한 노동력 착취로 생산된 쌀은 헐값에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소작인들은 과중한 소작료와 수세 때문에 농사를 질수록 빚만 늘어나 농토를 버리고 만주나 간도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철원평야 개척의 획기적인 계기가 된 것은 조선중앙수리조합(朝鮮中央水利組合)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22년 1월 1일 기존에 있던 철원수리조합(鐵原水利組合)을 평강군(平康郡)까지 확장하여 규모를 6,000정보에서 8,500정보로 늘리고 이름도 중앙수리조합으로 바꿀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조선총독부가 한반도의 중앙을 의미하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수리조합을 철원에 설치한 것은 철원군의 지정학적 가치와 정치·경제적인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었다. 철원군 경제 발전의 돌파구가 된 것이 봉래호 저수지 축조이다. 북한의 강원도 평강군에 있는 봉래호 저수지는 유역면적이 4.78㎢, 둘레 14.6㎞, 길이 5.1㎞이다. 일제 강점기인 1923년 철원, 평강 대지를 흐르는 임진강 지류인 역곡천 상류를 막아 건설한 관개용 인공저수지이며, 하천 바닥은 전반적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기슭에서 중앙으로 가면서 비탈져 있다. 봉래호 저수지 물은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일대까지 다다랐다.
조선중앙수리조합 성립 후 1924년 조선총독부는 철원평야 개척과 소작을 담당할 노동자들을 전국으로부터 대거 모집해 이주시켰다. 수리조합을 세워 저수지를 만들고 새로운 농지를 개간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우선 1,500호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철원으로 대거 이주시켜 당해 수리조합이 경영하는 개답(開沓) 작업에 종사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철원의 중앙수리조합은 원활한 개답을 위해서는 최소한도 1,500호의 주민이 필요하다고 요청하였다. 1924년 4월 10일 선발진 약 500호가 철원에 영주할 목적으로 이주하고 나머지 1,000호도 곧 차질 없이 진행하여 조선 내 노동자 생활을 안정케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주가 국가 전체적인 노동력 조절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수리조합의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그리고 당시 이주하는 이들은 선조 대대로 경작하던 옥토를 일본인들에게 강탈당하고 생계가 막막해서 어쩔 수 없이 온 사람들이었다.
불이흥업회사(不二興業會社)가 경영하는 불이농장은 군산(群山)과 용암포(龍岩浦) 등 각지에 광대한 토지를 점유하여 곳곳마다 마치 소왕국이 건설되어 있는 것 같았다. 불이철원농장에서는 철원군 일대 8,800정보라는 광대한 토지를 획득하자 그것을 경작할 소작민이 필요하였고 일본에서 이민을 데려오는 것보다 조선 안에서 임금이 낮은 조선 농민을 모집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개답조합이라는 것을 조직하고 1924년 정월부터 조선 내에 선전하여 이민을 모집하였다. 불이흥업회사에서는 이민을 모집함에 있어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당국에서는 이민 모집을 소작문제가 자주 일어나는 전라도에서 주로 모집하려 하였으나, 불이흥업회사에서는 전라도 농민의 성질이 불량하다 하여 오히려 전라도만 제외하고 전국의 각 도지사에게 이민 모집 권유를 의뢰하였다. 지금도 철원군 동송읍에 평안도촌(平安道村)과 경상도촌(慶尙道村)이 존재한다. 일제 강점기 철원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동향 출신끼리 자연히 한데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서로 의지하면서 고된 타향살이를 이겨냈다.
[철원의 운명을 가른 토목공사 토교저수지 건설]
철원군은 일제 강점기 철원 북방에 만들어진 봉래호 물을 받아 농사를 지어 왔다. 하지만 6·25전쟁이 끝나고 김일성이 봉래호에서 내려오는 대간선 수로를 끊고 황해도 연백 쪽으로 돌려 버렸다. 봉래호 용수로 중 철원 방향 3호 간선은 하갈리~연주고개~양지리~대위리~오덕리~장흥리~냉정리로 이어지는 용수로였다. 수복 직후 수로는 있으나 물이 없으니 농사를 못 지어 농민들이 난리였다. 한탄강에는 항상 물이 흘렀지만 양수시설이 없어 무용지물이었다. 전체 농토의 20~30%만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농민들 생활은 점점 더 피폐해졌다. 그래서 농민들이 애타는 심정으로 당시 공화당 원내총무였던 김재순(金在淳) 지역구 국회의원을 찾아가 대규모 저수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하였다. 평안도 출신 실향민인 김재순이 적극 나서서 추진하였다.
하지만 건설 예정지 양지리는 DMZ와 인접한 민통선 안이라 유엔군 관할구역이었다. 민간인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사전조사도 불가하고 실시설계도 할 수 없었다. 지도의 등고선만 보고 설계하여 유역면적과 제당 높이를 계산하였고 저수량과 몽리면적을 추산하였다. 한 번도 현장에 가 보지 못하고 도면상으로만 설계를 하였다. 토교저수지는 물의 유입이 적어 한탄강에 대규모 양수기를 설치하여 물을 퍼 올리는 조건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일단 제당 설치할 곳만 지뢰 제거 작업을 벌이면서 본 설계를 동시에 진행하였다. 토교저수지 공사는 대한민국 굴지 토건회사인 삼환기업이 하였다. 그런데 예산이 제때에 집행되지 않아 지지부진하였다. 토교저수지 축조 공사 정식 명칭이 ‘전천후 농업용수원 개발사업’이었는데 공사 기간이 너무 오래 걸려 동네에서는 ‘천천히 사업’이라 하기도 하였다. 평야 부분은 나중에 하더라도 일단 담수해야 하니까 제당공사와 양수장 공사를 빨리 서둘렀다. 제당 만드는 데 3~4년 걸렸고 전체 공사 기간이 10년 걸렸다. 몽리 지역으로 가는 각 수로를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토교저수지는 한수 이북에서는 가장 큰 저수지이다. 총공사비가 20억 정도 들었는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였다. 1978년 토교저수지가 완공되고 물 공급이 안정화되면서 철원군 벼농사가 황금기를 맞았고 강원도 제일의 농업군으로 우뚝 섰다.
[녹색혁명 완수의 기반이 된 경지정리 사업]
경지정리 사업은 철원군을 획기적으로 바꾼 사업이다. 경지정리 사업은 경작면적이 늘어나고 농사 효율성을 높이는 데는 최고였다. 철원은 준 산간지대이기에 가장 적절하였다.
강원도 철원군에서 제일 먼저 경지정리를 한 곳이 오덕1리와 오덕2리 사이의 농토이다. 도로의 북쪽이 100정보, 남쪽이 150정보가량 되어 일단 남쪽 지역부터 시작했다. 원래 좋은 땅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경지정리 사업을 반대하였다. 안 하려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 어려웠다. 농지를 평평히 만들고 900평[30m×100m] 규모로 잘라 논두렁과 용수로, 배수로를 만들어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면적이 맞지 않는 경우는 한 배미를 잘라서 분할할 수도 있고 아주 적은 면적은 돈으로 환산하여 주기도 하였다. 경지정리 사업은 가을 수확이 끝나면 바로 시작하여 말뚝 꼽고 불도저로 밀어붙여 이듬해 봄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끝냈다. 처음에는 사업 추진하기가 힘들었는데 나중에는 서로 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왜냐하면 해 놓으니까 일단 면적이 늘고 농사짓기도 편하며 농사 효율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시행한 1차 경지정리 사업으로 철원평야의 웬만한 농지는 다 정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