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동 동양촌 - 통과의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497
한자 -東陽村-
이칭/별칭 산양재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출산]

현재는 모두 조산원이나 산부인과에서 출산이 이뤄지지만 예전에는 산파를 불러 집에서 낳았다. 산모의 진통이 시작되면 산파는 방의 자리를 걷고, 미리 추려놓은 짚을 깔고 그 위에 재문지를 깔았다. 아이를 낳으면 탯줄은 산모와 아이 쪽으로 모두 한 뼘씩 남기고 잘랐다. 자른 탯줄과 분비물은 왕겨 속에 넣고 마당에서 삼불을 놓아 태웠는데 이 삼불은 사흘 정도 탔다. 삼불이 다 타 재가 되면 쓸어 모아 소나무 밑에 뿌렸다.

금줄은 왼새끼를 꼬아 대문에 쳤는데 아들이면 숯과 고추를 꽂고, 딸은 숯·고추·솔잎을 꽂았다. 보통 이레 정도 쳤다가 그 후에 걷어서 울타리에 걸어놓아 자연소멸 시켰다.

예전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집에서 키우는 가축이 새끼를 낳아도 대문에 금줄을 쳤다고 한다.

첫국밥은 미역국과 밥을 준다. 삼밥을 이 마을에서는 ‘삼자리’라고 하였다. 삼밥은 삼날, 첫이레날, 두이레날 등 칠일 간격으로 세 번 정도 올렸다. 짚을 잘 추려 깨끗하게 씻어 말린 다음 아이를 낳은 자리에 깔고 그 위에 밥·국을 놓고 “우리 애기 건강하게 잘 자라게 해주십시오”하고 합장한 후 절을 한다. 이는 아이의 무병장수를 삼신할머니에게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기의 백일에는 수수팥떡, 흰무리 등의 떡 세 가지 또는 다섯 가지를 삼자리에 차려 놓고 아기의 무탈을 빌었다.

[상례]

동양촌은 순천박씨(順天朴氏) 집성촌이었던 만큼 연반계가 아직까지 남아있어 장례의 절차나 형식이 도시화 양상을 띠지는 않는다. 상여계인 연반계는 지금도 회원이 58명 정도이다.

연반계의 시초는 예전에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품앗이의 형식으로 각 호당 한명씩 의무적으로 가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가입비는 당시 쌀 한 짝이고 부모가 죽으며 자식으로 대(代)를 이어 연반계에 가입했다. 출향한 사람들도 동네에 초상이 나면 한 가구당 한명은 의무적으로 조문을 온다고 한다. 혹 안 올 경우는 벌전이 있고, 큰일을 당해도 가지 않는다.

연반계 회원들은 초상이 나면 음식을 준비하고 상여를 꾸려 대털이를 하고 운구하여 하관까지 모든 일을 했는데, 지금은 상포사에서 물건이나 그 외 준비를 하기 때문에 일이 많이 줄어들어 손님 대접, 상여메기, 하관(下官) 등이 주된 일이다.

마을이 도시화되면서 동네에서 초상을 치르기보다는 점차 병원 영안실이나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연반계 회원은 각지에서 모두 찾아와 장지까지 상여를 메고, 삼오제까지 참석한다. 이는 동양촌이 집성촌 형태의 마을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 지속될 수 있었다.

[제례]

동양촌은 기제사로 4대봉사를 하고, 이외 청주시에서 주관하는 의병제에 참석한다. 임진왜란 당시 청주성 탈환을 기념하기 위해 9월 6일 중앙공원(中央公園)에서 의병제를 지내는데 이에 주민들이 많이 참석하고 있다.

마을 앞에 위치한 원모단은 순천박씨 전체 조상 중에 묘소가 없는 여덟 분을 모신 사당으로 음력 9월 첫 번째 일요일에 제를 올린다. 예전에는 9월중 택일 하여 올렸으나 타지의 후손들과 직장생활 등의 문제로 첫 번째 일요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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