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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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傳統文化-萬邦-世界記錄遺産直指 |
영어의미역 | Jikji, Memory of the World Register |
이칭/별칭 | 직지심체요절,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심체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승환 |
[직지의 일반개념 및 정의]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줄여서『직지』는 흥덕사에서 1377년에 금속활자로 간행한 책의 이름이다. 원 제목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이 책의 이름을 줄여서『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직지심체(直指心體)』, 『직지』 등으로 부르고 있다.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주최한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책' 전시회에 『직지심경(直指心經)』이라 소개되면서 한때 잘못 불리기도 하였다. 불교에서 '경(經)'은 불교경전을 뜻하는 것이다.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불경이 아니고 교육용 서적이므로 『직지심경(直指心經)』은 잘못된 표현이다. 이렇게 볼 때 판심제(版心題)에 나타나 있는 객관적인 뜻을 포괄하면서 간략하게 줄인『직지』가 일반적인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금속활자본 『직지』는 고려 우왕 3년(1377) 7월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하였으며, 본래 상·하 2권이었으나, 현재 상권은 전해지지 않고 첫째 장이 떨어져나가고 없는 하권 1책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Manuscrit Orianteaux)에 소장되어 있다.
[직지의 가치]
『직지』는 비자본재이다. 간단히 말해서 문화자산이다.『직지』는 지극한 정성, 욕망의 절제로서의 보시(布施), 경건함, 기원(祈願), 겸손, 자비(慈悲), 그리고 깨달음 등의 정신문화의 측면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대량생산이라는 상업화의 자본주의적 개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직지』는 존재하고 있다. 문화사적으로 보면『직지』는 금속활자라는 진품성과 불교문화의 분위기(aura)가 그 정수(精髓)였다. 고려 말의 고승 백운화상의 뜻을 ‘널리 오래’전달하기 위하여『직지』가 간행되었다.
금속활자본『직지』는, 그 내용보다는 인쇄의 형식 때문에 중요하다. 금속활자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간기인 ‘鑄字印施’의 해석은 1) 주자하여 인쇄했다는 뜻과 2) 주자된 글자로 인쇄했다는 뜻의 두 해석이 가능하다.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에서 주자하여 인쇄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흥덕사에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를 주조했다는 뜻이 되므로 세계문화사에 빛나는 자산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 이미 주조되어 있는 활자를 이용했더라도『직지』의 문화사적 가치는 반감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 이미 사용된 활자나 다른 지역에서 가져온 활자로 인쇄했다면 한국의 인쇄문화가 융성했음을 증명하면서, 『직지』가 존재하는 현실적 징표가 되는 것이다.
[금속활자본 직지의 간행]
한국문화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문화재나 문화자산은 많지 않다. 그 중에서 『직지』는 세계문화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한국 민족문화의 빛나는 자산이다.『직지』가 중요한 것은 교육서이자 불교문화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금속활자로 간행되었다는 데 있다. 따라서 금속활자본『직지』를 누가 어떻게 간행했느냐가 중요하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직지』가 간행된 것은 1377년이다. 청주목(淸州牧) 밖에 있는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배포하였으며 연화문인(緣化門人) 석찬(釋璨), 달잠(達湛), 시주 비구니 묘덕(妙德)이라는 간행 기록이 있다. 백운화상의 제자이면서 시자(侍者)였던 석찬은 스승이 편집한『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을 금속활자로 인쇄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비구니 묘덕은 흥덕사 금속활자본과 취암사 목판본의『직지』 간행에 모두 관여한 인물이다. 석찬과 달잠은 모두 백운화상의 제자로서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펴기 위해 묘덕의 시주를 받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직지』를 간행하게 되었다.
[직지의 구성]
『직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수식이 따라 붙는다. 『직지』는 본래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흥덕사에서 간행된 금속활자본은 현재 상권은 전하지 않고, 하권 1책(총 38장)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전한다. 경기도 여주 취암사에서 간행된『직지』목판본은 상·하권이 완전한 1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및 영광 불갑사에 소장하고 있다. 금속활자본만으로는 알 수 없는 체제나 내용을 목판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직지』는 석옥선사가 전해준『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에 『선문염송(禪門拈頌)』과 『치문경훈(緇門警訓)』 등에서 그 내용을 보완하고 과거 7불(佛)과 인도 28조사(祖師), 중국 110선사 등 145가(家)의 법어를 가려 뽑아 307편에 이르는 게·송·찬·가·명·서·법어·문답 등을 수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선사로는 유일하게 신라 대령선사(大領禪師)가 하권에 수록되어 있다.『직지』의 중심 주제는 〈직지심체〉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불도를 깨닫는 명구(名句)에서 비롯된 것으로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직지의 편찬자]
『직지』를 편저한 백운화상의 호는 백운이고, 법명은 경한(景閑)[1298~1374]이다. 백운은 충렬왕 24년(1298)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출생하였다. 충정왕 3년 54세(1351) 5월에 중국 호주의 석옥(石屋)선사에게 불법을 구하였다. 석옥선사로부터『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1권을 전해 받고 불도를 닦아, 공민왕 2년 56세(1353) 정월에 마음을 밝혀 불도를 체득하였다. 또한 백운은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에 황해도 해주의 안국사(安國寺)와 신광사 등에서 주지를 지내고, 후진 양성에 힘쓰다 공민왕 21년 75세(1372)에 성불산 성불사에서 145가(家)의 법어를 가려 상·하 두 권으로『직지』를 편집하여 저술하였으며, 공민왕 23년 77세(1374)에 여주 취암사에서 입적(入寂)했다.
[직지의 프랑스 소장 경위]
한국인들은 『직지』가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허탈해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세계문화사에 길이 빛날『직지』가 한국에 없다는 이 상실감은 그러나『직지』를 사랑하고 아끼는 운동으로 드러나면서『직지』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직지』는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소장되어 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초대 주한대리공사로 부임한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1853~1922]가 우리나라에 근무하면서 고서 및 각종 문화재를 수집하였는데, 그 속에 『직지』가 포함되었던 것이다.『직지』의 수집 경로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1865~1935]이 1901년에 저술한『조선서지(朝鮮書誌)』의 보유판에 게재된 것으로 보아 1900년경에는 이미 수집되었으며, 1911년 드루오호텔에서 경매되었다. 쁠랑시가 우리나라에서 수집해간 대부분의 고서는 모교인 동양어학교에 기증하였다. 그러나 금속활자본 『직지』는 앙리 베베르(Henri Vever)[1854~1943]가 180프랑에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1950년경에 그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 발굴]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는 충청북도 청주시 운천동에 있는 통일 신라시대의 절터로 사적 제3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홍덕사는 우왕 3년(1377)에 백운화상이 초록한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을 주자하고 발간한 절이다. 오랫동안 흥덕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으나 그 위치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국토지개발공사에서 1984년부터 청주시 운천동에 택지를 조성하면서 한 이름 없는 절터가 발견되었다. 곧 충청북도와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을 하게 되었는데 1985년 긴급구제 발굴을 할 때 출토된 ‘서원부흥덕사(西原府興德寺)’라는 글씨가 새겨진 쇠북과 ‘황통십년흥덕사(皇統十年興德寺)’라고 새겨진 큰 그릇 뚜껑을 땅 속에서 찾게 되어 이 곳이 흥덕사지(興德寺址)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절터는 택지를 조성하면서 반파되어 발굴 결과 금당지, 강당지, 회랑지의 유구만 확인되었다. 이를 토대로 흥덕사의 규모를 재구한다면 남북 중심축에 중문·탑과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 그리고 정면 4칸, 측면 2칸의 강당이 놓이고 금당의 좌우에 정면 12칸, 측면 1칸의 동서회랑이 배치된 단탑 가람으로 추정된다.
[직지의 재발견과 공인]
『직지』는 1901년 모리스 꾸랑이 저술한『조선서지(朝鮮書誌)』보유판에 수록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실물과 내용은 확인되지 않다가 1972년 "세계 도서의 해(International Book Year)"를 기념하기 위한 '책' 전시회에 출품됨으로써 세계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직지』의 간행 장소인 청주 흥덕사도 1985년 청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됨으로써 오늘날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번지[직지대로 713]임이 확인되었다. 이를 계기로 1986년 충청북도 주최로 열린 〈청주 흥덕사지 학술회의〉를 통해 흥덕사가 학계에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1992년에는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의 정비와 함께 청주고인쇄박물관을 개관하였다. 2000년에는 『직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를 개최하였으며,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직지』를 등재시킴으로써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그 의미를 다시 공인받게 되었다.
[금속활자본 직지의 서지적 특징]
금속활자본『직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서지적 특징이 있다.『직지』 하권의 판식(版式)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이고, 계선이 있다. 반엽(半葉)의 행자수(行字數)는 11행 18~20자이며, 주문(註文)은 쌍행이다. 판심에 어미는 없고, 판심제는 「직지(直指)」이며, 권말제(卷末題)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책의 크기는 24.6 17.0㎝이며, 다섯 구멍을 뚫고 붉은 실로 꿰맨 선장본(線裝本)이다. 종이는 전통한지에 인쇄되었으며, 전체가 상당한 솜씨로 배접되어 있다. 표지는 능화판 문양과 종이로 보아 배접하면서 조선 후기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표지에 “1377년이라는 연대와 함께 주조된 활자로 인쇄되었다고 알려진 가장 오래된 한국 인쇄본이다”라는 모리스 꾸랑의 기록이 있다. 종이는 닥나무 종이이다. 오랜 기간에 비하여 종이색이 그렇게 많이 퇴색되지는 않았다. 흰빛깔이고 아주 얇다. 배접할 때 다리미질을 하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좀 미끄러운 감이 있다. 인쇄상태는 생각보다 아주 양호하다. 먹 빛깔은 진하지 않다. 책장마다 찍혀진 먹색의 농후도가 거의 같다. 특히 첫장이나 마지막장에 찍혀진 먹색이 비슷하다.
금속활자본『직지』에 나타나는 금속활자본으로서의 특징은 1) 본문의 항렬(行列)이 바르지 않고 비뚤어져 있으며, 그 중에는 글자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경우도 있다, 2) 인출(印出)된 자면(字面)에 나타나는 묵색(墨色)의 농도 차이가 심하고 반점(斑點)이 나타나 있는 경우가 많다, 3) 일(日)이나 일(一) 등의 글자는 아예 거꾸로 식자된 경우도 있으며, 어떤 글자는 인쇄 도중에 탈락된 경우도 있다, 4) 동일면에서 동일한 활자의 같은 글자모양이 보이지 않으나, 동일한 활자가 다른 장에서는 사용되고 있다, 5) 글자의 획에 너덜이와 티가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는 점 등이다.
[직지의 문화사적 의미]
『직지』의 문화사적 의미는 여러 가지다. 인류문화사에서 『직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교육과 정보의 공유라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인류는 의사 전달을 위해 네 번에 걸친 정보혁명을 거쳐 발전하였다. 첫째로는 몸짓이나 소리에 약속된 의미를 부여하여 의사를 전달한 것을 말할 수 있으며, 둘째는 각종 부호나 문자를 사용하여 기록하기 시작했다. 셋째로는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책을 간행한 일이며, 넷째로 컴퓨터와 사이버 체제의 확립이다. 이 가운데 가장 위대한 혁명은 금속활자의 발명을 꼽고 있다. 그 이유는 활자를 이용하여 책을 간행하여 보급함으로써 정보의 대량 전달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정보화의 가장 핵심인 금속활자의 발명이 13세기 초에 한국에서 일어났다. 13세기 초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기록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와 『상정예문(詳定禮文)』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는 1239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 전하고 있는데, 여기에 당시 최씨 무신정권의 우두머리였던 최이(崔怡)가 원래 금속활자본을 목판으로 다시 새긴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것으로 보아 1239년 이전에 이미 금속활자 인쇄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규보(李奎報)가 1234년에서 1241년 사이에 저술한『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의하면, 『상정예문(詳定禮文)』28부를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각 관서에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안타깝게도 기록으로만 전할 뿐 실물이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고려 우왕 3년(1377) 7월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한『직지』는 실물이 전하며, 한국인이 13세기 초에 금속활자를 발명한 슬기로운 문화민족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직지』는 인류문명사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의 소산인 동시에 오늘날의 인터넷 문화를 연 것이다.
[금속활자본 직지의 재생산]
『직지』의 정신과 의미를 재생산하기 위하여 청주시민과 청주시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청주시에서는 고인쇄문화 전수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 동림 오국진(吳國鎭) 선생으로 하여금 고인쇄문화 및 금속활자와 관련된 후계자 양성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기관이다. 오국진 선생은 충북 청원군 현도면 달계리에서 출생하였다. 우송(又松) 이상복 문하에서 금석문과 서예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성오 신학균 선생 문하에서 각자술을 익혔으며 철제 오옥진 선생으로부터 서각기법을 전수 받아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목판을 복원하는 등 그 동안 서예와 서각(書刻)을 연구해 왔다. 또한 주물공장에서 주물의 기능을 익히기도 하였다. 오국진은 이러한 기초를 바탕으로 1985년 무렵부터 금속활자 복원의 기초를 쌓고 기능을 익혀 금속활자를 주조하게 되었다. 그 후,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직지』의 첫째 장을 복원한 것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의 활자를 복원하는 등 고려에서 조선 초기의 금속활자 제작방법을 실증적으로 재현해 내고 있는 유일한 기능자로 조사되어 1996년 2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 101호 금속활자장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충북 청주시 소재의 고인쇄문화공방과 고인쇄문화전수관을 함께 운영하면서 금속활자와 관련된 후계자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오권진, 임인호, 맹창균 등의 이수자들에게 금속활자 제조기법, 보필작업, 밀납새김, 활자보관함 제작 등의 실습을 지도하고 있으며, 또한 금속활자장 기능의 보존과 육성을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직지오페라]
『직지』를 예술로 재창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97년부터 충북의 예술가들을 중심으로『직지』의 예술화가 논의되었으며, 그 형식적 결과로 오페라를 만들기로 했다. 강태재, 윤석위, 도종환[1954~ ], 김승환, 남기헌, 송재봉 등의 발의로 청주대학교 교수이자 충북오페라단 단장인 김태훈(金泰勳) 교수, 성악가 이상현, 성악가 강진모를 중심으로 일이 진행되었으며 대본은 김승환 교수와 김민형 시인이 공동 창작했고 작곡은 중앙대학교의 박범훈 교수가 맡았다.
제 1막은 「청산별곡」과 「머나먼 이국의 하늘에」이며, 제 2막은 「가시리 가시리잇고」이다. 제 3막은 「진흙 속에 피는 연꽃」이며, 제 4막은 「직지」이다. 오페라의 음악은 한국전통의 가락을 중심으로 하는 쉽고도 아름다운 화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음악 고유의 선법과 장단을 사용해 풍부한 한국적 색채와 익숙한 국악적 선율, 「가시리」와 「청산별곡」 등 가사만 전해지는 고려가요 등을 활용한 아리아 등이 색다른 오페라이다. 초연은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 개막을 전후한 2000년 9월 22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었으며, 2000년 11월 9일에서 12일까지 청주예술의 전당 대공연장에서 공연되었다.「직지」오페라는 ‘오페라 전체를 국악으로 연주하겠다는 착상과 시도가 지방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국 오페라에 새 장을 열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직지 오페라 추진위원회는 이 같은 성공에 힘입어 작품의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고 청주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이자 세계적인 작품으로 키워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직지찾기 운동]
『직지』찾기 시민운동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청주시민회(현재의 참여자치연대)는『직지』를 시민운동의 차원에서 승화시켜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광범위한 시민운동을 벌여 나갔다.『직지』찾기 운동은 청주지역의 고인쇄 출판문화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과 세계기록유산『직지』에 대한 보전운동을 통하여 역사적·문화적으로 청주지역의 찬란했던 고인쇄 출판문화를 재인식하고 우리나라 인쇄출판문화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홍보하려는 목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운동이었다.『직지』찾기 운동은 1996년 5월 유네스코 충북협회의 〈유네스코와 고인쇄문화〉라는 학술세미나의 토론회에서 청주지역은 고인쇄출판문화의 도시이며, 『직지』야말로 세계적인 가치가 있는 기록유산인 만큼 국내에 어딘가에 있을『직지』의 원본을 찾도록 노력하고 이를 널리 홍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져 시작됐다. 그것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며 세계기록유산인『직지』가 청주의 흥덕사에서 인출되었으나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하권 1권만 유일본으로 전래되고 있을 뿐, 국내 어디에도 소장된 곳이 없다는 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 후, 『직지』찾기와 함께 청주를 고인쇄출판문화의 세계적 명승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새로운 취지 아래 각 기관과 단체들은 물론 각계, 각층 인사들이 동참한 가운데 활발한『직지』찾기 운동이 전개되어 오고 있다.「직지」찾기 운동은 1997년 3월에 청주시민회에서 처음 시작한 이래, 1998년 10월부터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직지』찾기 전담반을 두고 전국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활동을 펴고 있다.『직지』찾기 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이 운동에 동참하는 단체들도 차츰 늘어나 지금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또한, 『직지』가 해외에 유출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1995년부터는 해외에까지『직지』찾기운동의 대상범위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직지』 금속활자본은 찾지 못하고 있다.『직지』찾기 운동은 우리 조상들의 소중한 고인쇄출판문화 유산인 삼국시대의 목판본『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인『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상정예문(詳定禮文)』, 『자비도량참법집해(慈悲道場懺法集解)』 등의 원본을 찾는 운동으로도 확대·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직지 사이클대회]
직지 사이클 대회는 대한사이클 연맹과 청주문화방송이『직지』에 대한 청주시민과 전 국민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그 중요성을 알리며, 국내 어딘가에 있을 금속활자본『직지』를 찾자는 취지로 개최하고 있는 대회이다. 1999년부터 〈국제 직지 도로 사이클대회〉라는 명칭으로 한국 도로 사이클의 도약을 위한 우수 신인선수 발굴과 도로 전문선수를 양성하고 올림픽대회를 향한 경기력 향상을 도모하여 한국 최초 올림픽 메달획득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여 왔으며 지금은 〈직지 사이클대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2000년에는 충북 음성의 벨로드롬에서 91개 팀 453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트랙경기와 도로경기로 나뉘어 치러졌다. 2001년에도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대만, 카자흐, 홍콩, 우즈베키스탄 등의 90여 개 팀 600여 명의 선수가 참여한 가운데 스프린트와 독주, 경륜경기, 속도경기, 올림픽 스프린트, 개인 추발 등 11개 종목에서 경쟁을 벌였으며, 전국을 일주하는 도로경기가 열려 『직지』에 대한 홍보와 사이클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켰다.
[문화자본 직지]
『직지』는 문화자본이면서 동시에 문화자산이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즉 『직지』는 1972년에 그 실체가 확인되었다. 그것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책의 해〉에 출품되면서부터다. 그러던 중 1984년,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지(興德寺址)가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이로부터 청주는『직지』의 문화적 가치를 재인식하게 되었다. 그에 따른 특별하고도 정성스런 노력이 뒤따랐다. 청주시민들은 세계적 문화자산의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대내외적으로 많은 일을 추진했다. 그 결과 2001년 9월 4일,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가 하면 2004년에는 유네스코가 직지상 제정을 승인하였다.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이라는 개념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만든 개념이다. 경제자본, 상징자본(symbolic capital), 사회자본(social capital)과 함께 중요한 자본의 개념으로 설정한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은 사회화 과정 속에서 획득한 오랜 특성과 습관(체화된 문화자본), 가치 있는 문화적 대상물의 축적(객관적 문화자본), 그리고 공식적인 교육자격과 훈련(제도적 문화자본)을 포함한다. 이 중에서 『직지』와 같은 유형물은 객관적 문화자본이다. 이 객관적 문화자본은 문화적 가치를 축적해 나가는 과정과 사용하는 과정으로 나뉜다.
현재『직지』는 문화자본을 축적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 청주인들의 몸에『직지』를 기억시켜서 체화(embodied)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면에 체화되어서 습관으로 드러난다. 이 때의 습관은 버릇이 아니라 자동반사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청주 =『직지』’의 자동반사적 등식화는 1990년대 이후에 급속히 강화되는 현상이다. 이 역시 그 자체의 진위나 가치판단과는 달리 문화 주체인 청주인들의 의식변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비교문화사적 관점에서의 직지]
『직지』를 비교문화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 후기의 사회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려 후기는 원나라의 오랜 지배 하에서 민족문화가 황폐화되었던 시기다. 그리고 성리학(性理學)의 대두로 인하여 불교는 역사의 주도권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중세 유럽과는 달리 자본주의나 상업화의 징후(徵候) 또한 보이지 않는다. 이 시대의 금속활자 발명과 산업은 별개였다. 반면 구텐베르크 활자는 유럽 문명의 전기(轉機)였으면서 산업화의 신호탄이었다. 특히 구텐베르크 활자는 근대화의 원동력인 부문형 생산과 대량생산의 규범과 형태를 띠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구텐베르크 활자는 ‘아름다운 예술성과 정교하다는 점, 그리고 근대의 과학화와 산업화라는 거대한 사회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중세 한국의 금속활자는 산업과는 별개로 정신적인 차원에서 주조된 정신문화적인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산업적 관점에서 고려 금속활자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대량복제의 상업성이 목적이 아니라 금속활자라는 '진품성과 유일무이한 현존성의 분위기(aura)'가『직지』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볼 때 1300년대 후반에는 불교적인 아우라(aura)가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반면 새로운 이데올로기인 유교가 중심축으로 대두하는 변혁기에『직지』는 간행되었던 것이다. 이 불교적 아우라와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정신적 교차 지점에『직지』는 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고려의 금속활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려 금속활자의 정신은 대량생산의 상업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량생산과 정신문화에 있다.『직지』는 지극한 정성, 욕망의 절제로서의 보시(布施), 경건함, 기원(祈願), 자비(慈悲) 그리고 깨달음 등의 정신문화의 측면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그 밖에 종이의 대량 생산, 먹의 생산, 책에 대한 수요, 금속활자 주조 기술과 불상 주조, 기름, 먹물 등에 대한 종합적 이해도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정신문화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은 「직지」의 뜻에서도 정확하게 드러나 있다. 달리 말해서 직지(直指)는 ‘곧바로 가르쳐 주고 정확하게 깨닫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상업화와 산업사회의 대량생산이라는 각도에서 『직지』를 바라보지 말고, 정신문화의 깨달음과 교육과 통합문화의 각도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따라서 정신문화와 물질문화의 교차점에서 만난 한국문화의 정점이 금속활자 인쇄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분업과 협동의 과정이 생략된 채 하나의 통합원리에서 『직지』가 간행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직지』는 정신문화가 물질문명을 지배하고 정신문화의 목적에 의해서 물질문명이 뒤따르는 총체적 통합원리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반면 구텐베르크 활자는 산업화의 욕구에 의해서 대량복사의 형태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그러니까 하부구조의 욕구가 필연적으로 활자로 드러난 것이다. 활자의 발명은 가속작용을 일으켜 필사공들의 직업을 박탈하면서 상업적인 인쇄를 허용하도록 만들었다. 고려활자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다. 활자는 활자로만 기능할 뿐이지 산업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이유는 지향목표가 달랐기 때문이다. 고려 금속활자는 대량생산의 상업화가 목표가 아니라 소량생산의 반상업화였다. 그랬기 때문에 목활자나 목판인쇄의 효율성보다는 활자주조의 정신적인 측면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처럼 고려의 금속활자는 인쇄된 객체가 중요했던 것이 아니고 활자 주조 과정과 인쇄의 정신적 측면이 중요했던 것이다.
[정신문화로서의 직지]
‘직지’의 뜻은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해탈의 경지로 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문화와 정신세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주의적 관점이다.『직지』는 언어 표현방식의 혁명이었다. 점진적 변화였지만 돌이켜 보면 혁명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 표현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 종이와 인쇄라는 고전적 방식은 가상공간에서 그 표현형식이 새롭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새로운 문법을 가진 전자언어가 생겨나고 있다. 전혀 새로운 문법 체계를 가지고 탈규준화를 가속화시키는 전자언어는 테크노 문화의 카오스적 흐름을 선도한다.
『직지』의 시대에는 종이라는 실체와 인쇄방식이라는 과정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종이 대신 마음대로 지우고 쓸 수 있는 사이버 공간(cyber space) 속에서 인간의 표현방식은 다양해졌다. 종이책은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지만 전자책이나 사이버 공간에서 표현되는 감정과 사상이 더 많아지고 있다. 삽시간에 표현방식의 무한한 용량을 제공해 준 이 디지털 원리는 표현 형식 자체를 바꾸어 버린다. 정보산업화로 인하여 정보의 저장 속도나 재생 속도는 더욱 놀라워졌고 정보 접속과 이용 시간은 무척 빨라졌다. 이것은 시간의 압축이다. 그리고 공간의 압축이다. 압축을 넘어서서 시간과 공간의 변형과 해체다. 그 변형과 해체를 지나서 새로운 창조다. 이렇게 볼 때 아날로그적 사고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틀이 바로 디지털의 원리다. 그 대표적인 매체 인터넷이 오늘날의 금속활자가 되어 예전에 금속활자가 했던 지식 확산과 정보 보급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다.
[사이버 시대와 지역문화의 재창조]
『직지』는 정보 사이버와 깊은 관계가 있다. 세상이 바뀌면 인쇄형식 즉 정보전달체계 또한 바뀐다. 때문에 인쇄는 상호소통적(interactive)이면서 융합(fusion)의 정신을 가지고 유연하게 새로운 인쇄 환경에 적응해야만 한다. 이것이 새로운 출판형식의 전자책(e-book)이다. 전자책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케케묵은 서고(書庫)’에 처박힐 것이다. 인류는 머지않아서 전자책과는 전혀 다른 정보전달체계를 완성시킬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정보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 역시 사이버에서 이루어진다. 디지털은 활판인쇄의 시공간성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식과 정보를 정리한다.
디지털 원리는 공간을 압축시키는 데 있다. 압축된 정보는 사이버 공간에 저장되어 익명으로 유통되고 소비된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정보화의 편차 역시 과거 자본과 권력의 편차만큼 벌어져 있다. 정보의 집중화 현상에 더하여 정보산업의 중앙집중화는 여전히 심각하다. 표면적으로 정보의 생산과 분배가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고급정보를 독점하고 소비하는 패턴(pattern)은 심화된 측면도 있다. 그러므로 산업사회의 봉건적 질서라는 이 패턴을 해체하는 것이야말로『직지』의 정신이다. 오늘날 근대자본주의 사회와 현대 산업사회에서 형성된 중앙집권의 형태는 시간과 공간의 재편성으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틀로 교체되고 있다. 여기서 독점의 해체, 영토의 탈영토화, 중앙의 탈중앙화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직지축제]
직지축제의 정식 명칭은 청주직지축제(Cheongju Jikji Festival)다. 2003년 처음 시작한 이 축제는 청주시가 주최하고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직지축제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주관하도록 하고 있다. 1999년부터 충북민예총을 중심으로 청주의 시민사회단체가 시민주도의 직지축제를 청주시에 제안하여 연구 검토를 거쳐서 시행된 축제이다. 직지축제의 배경 및 목적은 청주의 정신·문화적 자산인『직지』를 지역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하자는 데 있다. 그 방법으로『직지』가 갖고 있는 과학·정보적 가치를 구현, 『직지』의 문화적 가치를 표현하고『직지』의 학습적 가치를 실현, 『직지』를 알고, 사랑하고, 널리 알릴 수 있는 축제로 정착, 행사를 통해『직지』의 의미와 가치를 알 수 있는 축제로 발전시킴, 『직지』를 청주의 소중한 문화적 자산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함, 『직지』의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로 활용, 청주를 학습문화도시로 발전시킴 등이다.『직지』축제의 기조는 누구나·언제나·어디서나·원하는 학습에 참여할 수 있는 평생학습 인프라 구축, 학습을 통해 지식을 생성하고, 네트워크 정보망으로 확산·공유하며 이를 통해 청주를 지식기반 중심도시로 발전시킴, 문화를 통해 지역공동체를 재생·회복하여 풍요롭고 행복한 청주를 건설하는 것 등이다.『직지』 축제는 청주시 일원에서 매년 개최되고 있으며 앞으로 민족적이고 세계적인 축제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청주의 정체성과 직지]
청주시민과 청주시는『직지』를 민족문화자산의 상징이자 세계문화자산으로 공인받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청주시민들과 충북인들은 가장 중요한 상징이나 지역적 정체성으로『직지』를 꼽는다. 청주시에서는 직지계를 설치하여 청주고인쇄박물관과 함께『직지』를 전담하도록 했다. 그 결과로 『『직지』는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직지상 제정을 유네스코가 승인하고 청주시가 주관하는 직지상이 제정된 것은 2004년 4월 28일이다. 특히 세계기록유산 최초의 상이며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정한 유일한 상으로서 청주의 위상이 함께 높아졌다. 외교통상부와 한국유네스코위원회가 함께 노력하여 결정한 직지상은 프랑스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 제 169차 총회에서 심의 및 결정하였다. 직지상의 수상후보는 인류기록문화의 보존과 접근에 지대한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로 하며, 수상 시기는 2005년부터 2년마다 직지의 날에 시상하고, 상금액은 미화 3만 달러이고, 시상은 청주시나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하며 개최 장소는 유네스코 본부와 협의를 통하여 결정할 것 등이다.
직지 세계화는『직지』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고 세계문화사에서 공인을 받는 것이 그 목적이다. 사업으로는 청주를 『직지』의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향후 장기 계획을 수립하여 직지문화산업특구 조성, 유네스코 산하 국제기구 유치, 대규모 직지국제 학술대회 개최 등으로 세계기록문화의 연구와 교류 전시의 중심지로 발전시킬 것이며, 『직지』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활용하는 문화콘텐츠, 교육·게임프로그램, 특화상품개발 등으로 관광과 산업화가 연계되는 경제적 부가가치가 큰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한편 민간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직지포럼은 『직지』를 주제로 하거나『직지』를 계기로 삼아 시민의 담론을 이끌어내는 일을 하고 있다. 민간주도로 직지세계화추진단도 결성되었고, 그 밖에 수많은 직지애호가, 전문가들이 직지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