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3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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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臣 |
영어음역 | chungsin |
영어의미역 | loyalis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집필자 | 김양수 |
[정의]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
[개설]
충청지역은 조선시대 한성에 도읍한 이후에 많은 사람이 주거하게 되었다. 특히, 수도에서 낙향하거나, 선조의 묘지를 쓰고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고 충효를 강조하여, 충청지역에서도 충신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조선 이후에 많이 나타났다.
그런데 청주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죽은 사람은 드물고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죽어서 청주 근처에 묘지를 쓴 경우이다. 이들도 일단 청주의 인물이라 여겨 함께 기술한다.
[청주의 충신들]
1. 문·무신
고려시대의 충신에는 문신 왕가도(王可道), 고려 후기 문신인 한악(韓渥), 고려 말기 무신인 한방신(韓方信) 등이 있었다. 조선 전기의 충신들은 조선건국에 공을 세운 개국공신과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공신이 있다. 정탁(鄭擢)[1363~1423], 한상경(韓尙敬), 한백윤(韓伯倫), 한계미(韓繼美) 등이 대표적이다.
정탁과 한상경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헌하여 개국공신 1등과 3등에 책록되었다. 한계미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유민을 개간사업으로 안착시키고, 이시애(李施愛)의 반란 때 평안도의 정병을 이끌고 평정하여 적개공신에 올랐다.
2. 의병장
조선 후기의 충신으로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운 의병장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 이시발(李時發), 박춘무(朴春茂)[1544~1611], 조헌(趙憲)[1544~1592], 최명길(崔鳴吉) 등이 있다.
송상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동래성에 들이 닥치자 항전하였고, 이시발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박춘무에 종군하여 청주성(淸州城) 탈환에 공을 세웠다. 박춘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청주 복대리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조헌, 영규대사(靈圭大師)[?~1592]와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조헌은 임진왜란 때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등과 옥천에서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1592년 8월 영규대사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최명길은 정묘호란 때, 강화의 불가피함을 주장하여 지탄을 받아 경기도관찰사로 전임되기도 하였으며, 명나라를 치기 위한 청의 원병요구를 막았다.
3.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에는 손병희(孫秉熙)[1861~1922], 신채호(申采浩)[1880~1936], 한봉수(韓鳳洙)[1883~1972] 등이 있었다. 손병희는 보성학교(普成學校)·동덕(同德)학교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을 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다. 신채호는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였고 논설을 통하여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지원,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중국을 거쳐 광복회를 조직,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한봉수는 청주 출신으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청주 세교장(細橋場)에서 일어나 4년 6개월 동안 33전 1패의 전과를 거둔 유격전의 명수였는데, 충청북도 진천군 문배리에서 일본군 헌병 중위 시마자키 등 3명을 사살하고 그 무기를 노획한 것을 시초로, 약 30명 정도의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전으로 청원 미원, 진천, 괴산, 횡성, 이천 장호원 등으로 출몰하면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