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405
한자 徐光俊
영어음역 Seo Gwangjun
이칭/별칭 서병준(徐丙俊)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정봉동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재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아우 서병기(徐丙騏)|서병린(徐丙麟)|서병규(徐丙圭)
생년 1910년연표보기
몰년 1944년연표보기
본관 달성(達城)
양초(兩草)
출신지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정봉동
아버지 서상갑(徐相甲)
어머니 반남박씨(潘南朴氏)
아내 파평윤씨(坡平尹氏)

[정의]

항일 독립운동가.

[개설]

일제 강점기 청주지역에서 활동한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지방유지이다.

[가계]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호는 양초(兩草)로 학유공(學諭公) 서도(徐渡)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3·1운동 때 지방 책임자로 활약한 서상갑(徐相甲)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潘南朴氏)이다. 부인은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슬하에 1남을 두었다. 족보상에 나타난 서광준[1910~1944]의 이름은 서병준(徐丙俊)이며, 광준(光俊)은 자(字)로 기록되어 있다.

[학력]

옥산(玉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청주농업학교(현, 청주농업고등학교)를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맞이하였다.

[활동사항]

서광준은 강내면 출신의 항일투사 전병수(全炳壽)에게 사사(私師)를 받아 일생을 조국 광복 운동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옥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청주농업학교(현, 청주농업고등학교)를 입학한 그는 3학년에 재학 중인 1929년 11월 광주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항일 만세운동의 선봉이 되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의 독립운동 행적은 청주농업고등학교 교정에 있는 ‘청농학생독립운동기념탑(淸農學生獨立運動紀念塔)’에 기록되어 있으며, 독립기념관 제5관에도 광주학생항일운동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독립운동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한 그는 해외로의 망명을 꾀하였으나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해외 망명에 실패한 그는 국내에 남아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적 역량을 기르는 활동에 전념하였다. 야학(夜學)을 설치하여 미취학 농민자제들을 교육하는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제의 강제 공출에 항거하는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족 경제력 향상을 위해 자비(自費)를 들여 미호천(美湖川) 제방공사를 먼저 시작하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등에 찾아가 공사의 필요성을 적극 진정하여 결국 미호천(美湖川) 제방공사를 추진시켰다. 이로써 지금의 넓은 정봉평야가 형성되어 정봉, 신촌, 서촌 등 인근 지역 주민들의 생활터전이 마련되었다.

[상훈과 추모]

제방공사를 추진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2년 정봉동 주민들이 ‘서광준지사송덕비(徐光俊志士頌德碑)’를 세웠다.

[묘소]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학천리 산9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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