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1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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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又正 |
영어공식명칭 | Yang Ujeong |
이칭/별칭 | 양우정(梁雨庭),양창준(梁昌俊)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북촌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순 |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출신의 시인이자 정치가.
[활동 사항]
양우정(梁又正)[1907~1975]은 1907년 12월 19일에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북촌리에서 아버지 남원 양씨한익(漢益)과 어머니 김해 김씨이춘(二春)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양창준(梁昌俊)이었으나 8·15 광복 전에는 필명으로 양우정(梁雨庭)을 쓰다가, 8·15 광복 후에는 양우정(梁又正)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에게 한문을 수학하고 함안 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대구 고등 보통학교 4학년 때 반일 학생 사건이 일어나던 시기에 학자금 궁핍 등의 이유로 퇴학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校] 전문학부 경영학과를 다니다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 양우정은 신간회(新幹會)의 지방 지부에 가담하여 농민 소작 쟁의 등의 사회 운동에 뛰어들었다. 1928년에는 조선 청년 총동맹 경상남도 연맹 집행 위원, 함안 청년 동맹 위원장이 되어 청년 운동을 하였다. 1928년에는 『중외 일보』에 양우정(梁雨庭)이라는 필명으로 「쉬고 가소」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29년까지 다수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0년에 상경한 후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 가입하였는데, 이후 그의 문예관도 급속도로 계급적인 것으로 변해 갔다. 1930년에 잡지 『음악과 시』의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되었다. 그 해 이적효·엄흥섭 등과 함께 카프 개성 지부에서 기관지 『군기(群旗)』를 발행하여 주간을 맡았으며, 카프의 중앙 위원이 되었으나 나중에 『군기』사건으로 제명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고향 함안으로 내려와 함안 농민 조합에 관여를 하던 중에 국내 공작 위원회 사건 및 반제 동맹 사건에 연루되어 피검되어, 4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으며, 이때 상신서(上申書)를 제출하고 전향을 하게 되었다. 1936년에는 경상남도 문학 청년 동맹 사건[독서회 사건]으로 피검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하였다. 8·15 광복 후에 반공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된 양우정은 정부 수립 이후에 언론계에 투신하여 활약하였다. 반공 신문이었던 『대동 신문』[1945년 11월 창간]의 주필을 시작으로, 다수의 신문을 창설하는 등 언론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의 선전 부장으로 반탁 투쟁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 독립 노선의 승리』[1948], 『이 대통령 투쟁사』[1949], 『이 대통령 건국 정치 이념』[1949] 등으로 이승만에 대한 충정을 드러내고 정치인으로 변신하며, 양우정(梁又正)으로 개명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함안군 무소속]에 당선된 후에 자유당 결성에 공헌하여 정무 국장이 되면서 자유당의 실세가 되었다. 하지만 1953년 정국은(鄭國殷) 사건이라는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7년 판결을 받고 의원직도 상실하였다. 1954년에 특사로 풀려난 양우정은 은거하는 동안 시와 에세이를 비롯한 문학적 기록을 남기고, 1965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다가, 1975년에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28년 『중외일보』에 양우정(梁雨庭)이라는 필명으로 「쉬고 가소」라는 시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인 1928년에 19편을 연달아 발표하였다. 특히 「나면서」에서 가난 때문에 가족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식민지 현실을 그려 보였다. 1929년 상경한 후에는 본명인 양창준(梁昌俊)으로 「농민 문예 소론」 등의 산문을 발표하였고, 이때부터 계급주의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8·15 광복 후에 양우정(梁又正)이라는 이름으로 『싸우는 민족의 이론』[1947], 『이승만 대통령 독립 노선의 승리』, 『이 대통령 투쟁사』, 『이 대통령 건국 정치 이념』 등을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