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1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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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學 |
영어공식명칭 | Literatur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집필자 | 박종순 |
[정의]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문인이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언어와 문자로 표현한 창작 활동.
[개설]
농경 문화가 일찍부터 정착하여 발달한 함안은 서원, 향교, 불교 등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 예술이 꽃을 피운 곳이다. 문학 역시 인간의 삶을 반영하여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며 변화를 거듭해 왔다.
[전근대 문학]
선사 시대부터 발생한 문학의 기원은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 말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성혈(性穴)과 동심원(同心圓)이 새겨진 암각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암각화는 풍요와 다산을 위해 기도하고 춤추는 동작에 맞추어 노랫말로 된 원시 문학을 이루었을 것이며, 이는 시대와 함께 구전되어 구비 문학이 되고, 함안 지역의 농요에도 이어져 왔을 것이다.
함안의 한문학은 『함주지(咸州誌)』에서부터 논할 수 있다. 『함주지』는 지방 관지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함안 군수를 지낸 한강(寒岡)정구(鄭逑)[1543∼1620]가 1587년 향리에 있던 학자들과 함께 저술한 것이다. 이것은 함안의 지리, 풍물, 역사, 학문 등을 기록하여 종합 지리지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 함안은 고려 말 조선 초부터 성리학자와 문인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 사람인 신재(愼齋)주세붕(周世鵬)[1495~1554]은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여 한국 최초로 소수 서원[백운동 서원]을 세웠으며, 여러 편의 장가(長歌)와 단가(短歌), 그리고 『무릉 잡고(武陵雜稿)』를 비롯한 6편의 문집을 남겼다.
생육신인 어계(漁溪)조려(趙旅)[1420∼1489]는 낙향하여 백이산 아래서 은둔하며 스스로 어계 처사(漁溪處士)라 하였다. 숙종 때 그의 충절을 기려 군북면 원북리에 서산 서원(西山書院)을 사액하였고, 유저로 『어계집(漁溪集)』이 있다.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출신의 안희(安憙)[1551∼1613]는 의병을 일으켜 왜와 싸우다 아들 3형제가 모두 전사하였는데, 이를 기려 여항면 외암리에 두릉 서원(杜陵書院)을 세웠으며, 『죽계집(竹溪集)』이 있다.
이 외에도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쳐 수많은 문사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은 함안에 유별나게 재실(齋室)과 서원, 누정이 많다는 점이다. 함안에는 민중들 사이에 불렸던 구전 민요 또한 많이 전해 온다. 지방 민요나 농요 형식으로는 「모심기 노래」·「논매는 소리」·「상여 앞소리」·「권주가」·「자장가」·「시집살이 노래」·「물레 노래」·「지신밟기」 등이 있다. 함안군에서는 해마다 이를 재현하는 행사를 하고, 다른 지역의 각종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이어 오고 있다.
[근현대 문학]
현대로 내려오며 이름을 알린 함안의 문학인으로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문학 평론가 조연현(趙演鉉)[1920~1981]이 있다. 그는 『현대 문학』의 주간으로서 순수 문학론적 입장에서 전통을 적극 옹호함으로써 한국 문학에 기여한 공로가 큰 평론가이다. 현재 한국 문인 협회에서는 해마다 ‘조연현 문학상’을 수상하고 있으며, 함안 예술제에서는 조연현 문학 기념 백일장을 실시하고 있다. 2000년도 이후 함안군에서 몇 차례 조연현에 대한 기념사업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친일 논란이 일어 그 논의를 미루고 있다.
광복을 전후한 때는 함안에서 문학이 활발하게 다시 움트는 시기였다. 조연현의 지기였던 강학중(姜鶴中)이 소설로 등단하여 조연현과 더불어 동인 활동을 하고, 동인지도 발간하였던 것이다. 조연현이 상경한 후에도 강학중은 고향에 남아 동인지를 내고, 전국 문화 단체 총연합회 함안 지부를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때 동요 「고향의 봄」을 쓴 이원수(李元壽)가 함안에서 금융 조합에 다니며 문학 활동을 하였으나 이들은 직접적인 연결이 되지는 않은 듯하다.
6·25 전쟁 전후의 함안에서는 전기한, 강학중, 임영창 등 주로 교사들을 주축으로 하는 문학 활동이 펼쳐졌다. 당시의 활동 내용은 서사시 형식으로 『함안 문학』 제2집에 기고했던 임영창의 시 「아라가야의 경인년」에 잘 나타나 있다. 임영창은 함안 농업 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한국 불교 문인 협회를 창립한 시인이다.
"수도 탈환/ 평양 입성으로 환희에 찼던 것도 한때/ 그 해 겨울 중공군의 개입으로/ 또 다시 갈가마귀떼 같은 비운이 덮쳐왔다.// 함흥의 월남한 젊은이들로 조직된 방위군이/ 함안농고 교사를 병영으로 하여/ 수백명이 밀려와 득실거렸다.// 난 이때에/ 뜻 있는 지방의 동호인들과 손을 모아/ 문총(文總)과 학도의용대를 조직했다./ 문총구국대[전시에는 대 편성을 했다]/ 함안지대[후에 지부가 됨]/ 지대장 림영창[시]/ 부지대장 강학중[소설]/ 부지대장 변경섭[연극]/ 학도의용대 함안지대/ 지도관 림영창/ 지대장 조희건이었다/ 문총엔 문학, 음악, 미술, 무용, 연극, 사진 등/ 분과가 고루 있었다[피난 온 인사도 몇 있고……]/ 여기에 입회하고 싶다고 술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 1951년 3월에 문학의 밤, 무용, 음악회, 웅변대회를 종합한/ 미니스타일의 아라가야문화제를 열었다./ 그래도 가야왕국 천육백년만에/ 문화의 꽃이 처음 피어난 것이다/ 군민 모두 환호의 박수를 주었다."
이처럼 문학의 열정이 꺼지지 않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문학인들이 서울로 떠나는 마당이라 고향의 문학은 척박했다. 강학중, 구제옥 등이 주축이 되어 동인회 '파문'을 이끌며 함안 문학의 맥을 잇고자 하였으나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전국 문화 단체 총연합회 함안 지부 역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함안에 다시 문학이 활기를 띤 것은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교지(校誌) 활동이었다. 1958년 함안 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들을 중심으로 교지 『삼봉』이 창간되면서 문학의 불씨가 다시 살아났다. 또한 편집을 담당했던 이상규가 함안 중학교에서 분리된 함안 농업 고등학교[현 함안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재건 학생회의 문예부를 맡았으며, ‘갈밭’이라는 동인회를 결성하였다. 그때가 바로 4·19 혁명 직후라 그 여세를 몰아 1964년 2월 『갈밭』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당시의 분위기는 지도 교사 박능제의 시 「창간에 부치는 시」에 잘 드러나 있다.
"얼마나/ 대망의 날이 있었던가/ 진통의 울부짖음이 있었던가/ 무지와 무관심이 극한/ 지점./ 우리들이 팔을 걷고/ 일구어야 할 밭/ 우리들의 예지와 슬기를/ 심어야 할 밭/ 여기!/ 비로소 첫닭이 홰를 쳤고/ 먼 겨레와 나라에로 향한/ 현실앞에 서서/ 골목마다 우리들의/ 넋이 어리고/ 골목마다 우리들의/ 손과 발이 스쳐야 할/ 인류의 염원과/ 생명의 터에/ 우리들 다 함께 힘을 모아/ 처녀(處女)갈이를 해야 할/ 의미(薏味)가 여기 있다."
초등 교사들도 문학에 대한 교류가 이어지면서 동인지가 창간되었다. 이영호, 윤태환, 김상환 등의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살여울'이라는 동인회를 결성하고 1963년 1월 창간호를 낸 것이다. 당시의 회원은 황창규, 이기수, 서일조, 김상환, 이규일, 조동래, 윤확숙, 박원동, 이영호, 선영자 등이었다.
이후의 함안 문학은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이끌었다. 1985년 『경남 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동화 작가 조현술이 창작집 『까치골에 뜨는 달』을 출판하며 맥을 잇고 있었다. 그리고 1989년 5월 함안 문인 협회가 결성되면서 함안 문학은 조직을 정비하게 되었다. 1990년 6월 함안 문인 협회 창립 대회를 갖고, 한 달 후인 7월 28일에 한국 문인 협회로부터 예하 지부로 정식 인준[문협 제90-088호]을 받았으며, 12월에 『함안 문학』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함안 문인 협회는 2015년 『함안 문학』 제25집을 발간했는데, 말이산 고분군, 아라 홍련, 불꽃 무늬 토기 등 아라가야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을 주로 다루고 있으며, 여러 사람들의 일상들을 시, 시조, 소설, 평론, 수필, 기행문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그려 내고 있다. 또한 2011년에는 함안 문인 협회 소속 문인과 함안 출신 문인들이 고향의 아름다움과 아렴풋한 추억에 대한 그리움들을 글로써 풀어낸 작품들을 모아 시화집 『여항산 그림자 낙동강에 드리우고』를 발간했는데, 함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엮여 진한 향기를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흘 여드레 어김없이/ 칠원장은 성황이다/ 나뭇짐 세워놓고/ 흥정하던 유년의 장/ 아픔은/ 흔적도 없다/ 살아 있는 이 장터"[강재오「칠원장」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