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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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鏞浩 |
영어공식명칭 | Jo Yongho |
이칭/별칭 | 호진(浩進),소운(笑雲)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고은영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함안 지역에서는 서울3·1 운동 이후 독립 시위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주도하여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과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을 거행하였다.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조석규(趙碩奎)·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李在衡) 등이 계획하였다.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하고 인근 지역에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 준비를 하였다. 3월 20일 오전 9시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의 신창 야학교에서 시작되어 군북 장터로 퍼져 나갔다. 오후 1시경 3,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자 현지 경찰과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들이 공포를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오후 5시경에는 군중이 5,000여 명으로 늘어나 경찰 주재소로 나아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시위대에 공포를 발사하고 조준 사격을 하면서 현장에서 21명이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사람이 무참히 구타당하고 체포되었다.
[가계]
조용호(趙鏞浩)[1874~1919]는 자는 호진(浩進), 호는 소운(笑雲)이다. 아들은 조원제(趙元濟), 조창제(趙昌濟)와 1녀가 있다. 손자는 조경래(趙京來), 조정래(趙正來), 조외래(趙外來)가 있다. 동생은 조용학(趙鏞學)이고, 조삼제(趙三濟)는 조카이다.
[활동 사항]
조용호는 1874년 12월 25일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고종의 인산(因山)에 서울을 다녀온 후 조형규, 조창규 등과 함께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때 조용호는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일대의 군중을 동원하는 책임을 졌는데, 당일 오전에 마을을 돌며 시위 참가를 독려하고 군북 시장에 도착하였다. 시위 군중이 많아 군북 냇가로 독립 선언 장소를 변경하고 군중을 인도하였다.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선언식에 참가하여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시위를 이끌었다. 시위대가 군북 경찰 주재소를 포위하고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자 일본 군경이 조준 사격을 시작하면서 조용호도 적의 흉탄에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조용호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이 인정되어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