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34
한자 李元弼
영어공식명칭 I Wonpil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익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 4월 30일연표보기 - 이원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이원필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19년 3월 21일연표보기 - 이원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 - 이원필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이원필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원필(李元弼)[1884~1919]은 1884년 4월 30일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한일 병합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에 사는 외사촌 형 이경흠(李卿欽)과 서로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에 몰두하였다. 이경흠에게서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과 함안읍 만세 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같은 마을에 사는 조용섭(趙鏞燮)·조동규(趙銅奎), 군북면 사촌리의 조용규(趙鏞珪)·조주규(趙周奎) 등과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을 모의하였다.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의 후속으로 일어났다. 함안읍 만세 운동은 계획 때부터 군북 시장 만세 운동과 연대를 이루며 추진되었는데, 오일장의 순서에 따라 함안읍에서 먼저 만세 시위를 일으키고, 그 여세를 몰아 3월 20일 군북 장날에 만세 시위를 이어간다는 것이었다.

이원필 등은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을 추진하면서 신창 야학교의 교사 및 학생들과 힘을 합쳐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 제작하여 거사 직전까지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이 거행되었지만 일본군에 의해 시위 군중이 해산되자, 함안읍 만세 운동에 참가한 인사들이 군북으로 넘어오면서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이 발발하였다.

1919년 3월 20일 오전 9시 신창 야학교 학생들을 시작으로 오후 1시에 군북 시장에 모인 3,000여 명 군중이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북 시가지를 돌고 주재소로 향할 때는 시위 군중이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이원필은 준비한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선봉에 서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 도중에 이를 저지하는 일본 군경과 육탄전이 벌어졌고 현장에서 21명이 총탄을 맞아 순국하였는데, 이때 이원필도 일본 군경이 가한 총격에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아들은 이임선(李任善)이고, 손자는 이석제(李錫濟)이며, 증손자는 이민우(李敏宇)이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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