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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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圭錫 |
영어공식명칭 | I Gyuseok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고은영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함안읍 만세 운동은 고종의 장례식에 참배하러 갔다가 서울의 독립 선언식과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온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거사일은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이었다. 의거 날 정오 읍내 봉성동에서 수백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오후 2시 3,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 군중은 경찰 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마산 경찰 서장과 현지 경찰들이 출동하여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 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 선언서를 주고 독립 만세를 외치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시위 군중과 함께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시위행진하며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였다. 하지만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며 함안읍 만세 운동은 끝났다.
[활동 사항]
이규석(李圭錫)[1897~1950]은 1897년 12월 16일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재훈(李載壎)이고, 형은 함안읍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이희석(李喜錫)이다. 형 이희석의 영향으로 항일 운동의 필요성을 깨달았고, 1919년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 소식을 듣고 독립 선언식에 참석하였다. 이희석이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니 군중의 선두에 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재판 기록문에 "함안읍 소요 시에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크게 부르고 함안 우체국 문 밖에서 폭도들을 지휘하였으며 또한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주재소 난동시 폭행을 하였다"라고 하였다. 우체국장은 "이규석은 우체국의 전화기 및 유리창이 부서지고 아수라장이 될 때 우체국 앞에서 검암리 동민을 지휘하였다"라고 증언하였다. 징역 2년 형을 선고 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소 후 1927년 6월부터 동아 일보사 함안 지국 기자와 1929년 함안 협동조합을 발기하여 조합장이 되어 일제의 착취에 반대하였다. 고문 후유증으로 1950년 10월 5일 53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