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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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順益 |
영어공식명칭 | Bak Sunik |
이칭/별칭 | 박경흡(朴景洽)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구성길 55[구성리 751]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주용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서울에서 벌어진 3·1 운동 소식을 듣고 손종일(孫鍾一)·이원식·황대수 등이 모의하여 3월 24일 칠원 장날에 거사하기로 하면서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오후 4시경 장터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이자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였고, 군중은 칠원 시가지를 행진하고 경찰 주재소를 포위하였다. 일본 경찰이 착검한 총으로 군중을 위협하자 군중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엄주신(嚴柱信)·손종일 등이 주동이 되어 4월 3일 오후 3시에 2차 시위가 일어났다. 장터에서는 800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부르고 경찰 주재소를 포위하여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경찰에 대항하였다.
[활동 사항]
박순익(朴順益)[1882~1934]은 아버지는 박상선(朴尙善)이고, 아들은 박희근·박영도·박영근이며, 손자는 박진달·박진호·박영무·박성경이다. 박순익은 교회 활동에 주력하면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주민 계도, 미신 타파, 물산 장려, 자력 갱생을 역설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의 만세 소식을 접하고 3월 9일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과 3월 12일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박경천·황대수·황영환(黃英煥) 등과 3월 24일 칠원 장날에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박순익은 준비 과정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군중 동원에 노력하였는데, 당일 칠원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4월 3일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 2차 시위에서도 선두에 서서 주도하였다. 오후 5시경 800여 명의 군중과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면서 칠원 경찰 주재소에 투석하다가 체포 구속되었다. 1919년 5월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석방 이후에는 박경흡(朴景洽)이라 개명하고, 일제에 협조하지 않으면서 교회 일에 몰두하다 고문의 여독으로 1934년 10월 30일 53세로 작고하였다.
[묘소]
박순익은 대전 현충원 애국 지사 묘역 제3-435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91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