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7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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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載玉 |
영어공식명칭 | Gu Jaeok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장혜금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구재옥(具載玉)[1890~1953]은 1890년 11월 13일 함안군 함안면 봉성동에서 태어났다. 구재옥이 참여한 함안읍 만세 운동은 고종의 국장을 위해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한 후에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 등이 계획하였다. 그들은 이희석(李喜錫)과 안지호(安知鎬)의 지도로 시위를 철저히 준비하였다. 3월 15일 비밀리에 모이고, 다음 날 조병흠·한관렬(韓灌烈) 등은 독립 선언서, 한종순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또한 박노일(朴魯一)·김상집(金祥集)·조병대는 여항면 산서 지역에서, 백낙삼(白樂三)·안갑중 등은 가야면에서 군중을 동원하였다.
함안 장날인 3월 19일, 그들은 정오에 먼저 비봉산에서 고천제를 시작으로 이희석의 지시대로 군중을 함안군 함안면 봉성리로 집결시켰다.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한 후에 이희석은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오후 2시경 3,000여 명의 군중이 시가행진을 할 때 구재옥도 함께하였다. 군중은 함안 경찰 주재소를 파괴하고 우체국을 비롯한 함안 심상 소학교·함안 공립 보통 소학교·함안 공립 보통학교·등기소 등의 관공서를 습격하였다. 군중은 당시 함안 군수 민인호(閔麟鎬)뿐만 아니라 경찰 서장과 순사 부장에게도 독립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구재옥은 함안읍 만세 운동으로 체포되어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 받았다.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대구 복심 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의의와 평가]
구재옥이 참여한 함안읍 만세 운동은 다른 지역 의거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된 대규모 만세 운동이었다. 함안읍 만세 운동 사건으로 마산 지방 법원 원심에 회부된 사람만 63명이나 되었다. 함안읍 만세 운동의 영향으로 다음 날 군북 시장 만세 운동에 5,000여 명의 군중이 동원되었다. 또한 파리의 만국 평화 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마산 경찰 서장 기타무라[北村]에게 독립운동 사실 증명서를 요구하였다는 점도 매우 획기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