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7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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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潚 |
영어공식명칭 | I Suk |
이칭/별칭 | 여징(汝澄),갈촌(葛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류진희 |
[정의]
조선 전기 함안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여징(汝澄), 호는 갈촌(葛村). 재령 이씨(載寧李氏)함안 입향조 모은(茅隱)이오(李午)의 5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부제학을 지낸 율간(栗澗)이중현(李仲賢)이고, 아버지는 이경성(李景成)이다. 바로 위의 형이 모촌(茅村)이정(李瀞)이다.
[활동 사항]
이숙(李潚)[1550~1615]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서 태어났다.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중형 모촌이정과 더불어 성리학을 강마하였다. 정구(鄭逑)가 함안 군수로 부임해 오자 나아가 배웠다. 1591년(선조 24) 제포 만호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병기를 수리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였다. 당시 경상 감사 김수(金睟)가 겁을 내어 출전을 기피하므로 곽재우(郭再祐)가 그 죄를 성토하려 하자 김수 역시 곽재우를 토적으로 무고하려 하였다. 이에 이숙이 두 사람을 강화시키고, 초유사김성일(金誠一)의 막하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방략을 진언하였다.
정유재란 후 합천 군수로 있을 때 매헌(梅軒)정기룡(鄭起龍)과 더불어 적을 쳐부수었으며, 또 별장 조계명(曺繼明)과 함께 적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 합천 군수로 재임할 때 정사가 간결하고 송사가 공평하여 고을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605년(선조 38) 장성 현감을 거쳐 광해군 때 군자감 판관을 지냈다. 만년은 유현(儒賢)을 따라 학문에 전심하였다.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 곽재우 등과 교유가 두터웠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갈촌 실기(葛村實記)』가 있다.
[묘소]
묘는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인곡리(仁谷里) 선영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선무훈(宣武勳)에 녹권되었다.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파수리도계 서원(道溪書院)에 향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