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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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咸安 靑年 同盟 伽倻 支部 |
영어공식명칭 | Gaya Branch of Haman Youth Union |
이칭/별칭 | 함안 청년단,함안 청년회,함안 청년 동맹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광욱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 있었던 함안청년동맹 소속 지부.
[설립 목적]
함안 청년 동맹 가야 지부는 품성 향상, 지식 계발, 체육 장려, 산업 발달, 풍속 개량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변천]
함안 청년회는 1920년 7월 30일 함안읍사립 안신 학교(安信學校)에서 창립되었으며 함안 청년단으로도 불렸다. 설립 초기인 1920~1923년, 임원들은 지주, 양조장 운영자, 사립학교 설립자, 면장, 신문 지국장 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역 내에서 지배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함안 청년회는 1923년 이후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1925년 11월에 새로 창립하는 형태로 발기 대회를 가져, 18세 이상부터 25세 미만까지의 소장 청년층이 새롭게 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조진규(趙珍奎)와 조한휘(趙漢輝)였고, 이후로 이들은 사회 운동과 민족 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927년 함안 청년회는 지역적으로 단일한 청년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함안 청년 동맹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와 함께 함안 청년 동맹의 지부들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1929년 4월 함안 청년 동맹 군북 지부가 결성되었고, 이듬해인 1930년 9월 20일에 함안 청년 동맹 가야 지부가 설치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설립 초기의 함안 청년회는 야학 강습소 마련을 위한 소인 극단 순회공연, 야학 운영을 통한 일어와 산술 교육[야학 참가 학생은 부인 120명, 남자 노동자 70여 명], 계절별 각종 운동회 개최, 봉건적 인습 타파를 위한 계몽 운동 등과 관련된 사업과 업무를 수행하였다.
[현황]
1920년 7월 30일 당시 임원진은 회장 조동찬, 부회장 조성두, 총무 조동락과 이현각, 교육부장 황정중, 사회부장 안재휘(安在輝), 산업부장 안사렬, 재무부장 조용복, 의사회장 이진구, 서기 이정식과 조문극 등으로 구성되었다. 1923년에는 교육, 체육, 음악 3부를 새롭게 신설했고, 신설된 교육부에서는 매주 토요일마다 토론회를 개최하여 청년의 지식과 언변 계발에 힘썼다. 1920년대 전반기의 청년 운동은 사회 개조론에 입각하여 구 인습 타파, 교육의 보급, 경제적 자립 등을 강조함으로써 일반 대중이 봉건적 인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각과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전반기의 청년 운동은 1923년 이후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분위기가 크게 바뀌게 되었다. 함안 청년 동맹 및 그 지부가 활동하던 시기의 청년 운동에서는 일제에 저항하는 대중 투쟁이 훨씬 더 강해졌고, 이에 대한 일제의 강경 탄압도 훨씬 더 노골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의의와 평가]
1920년대 초반 개량적인 성격으로 시작된 청년 운동은 1923년 이후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점차 저항적이고 민족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