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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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咸安 地域 靑年會 |
영어공식명칭 | Haman Area Youth Associ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청년 운동 단체.
[개설]
3·1 운동은 이후의 민족 해방 운동이 노동, 농민, 여성, 청년 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전국 각지에서 지배 엘리트들이 주축이 된 청년 단체들이 대거 생겨났다. 1920년 12월 1일 120여 개의 청년 단체들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에서 조선 청년회 연합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30개의 청년 단체가 참가하고 있었는데, 함안 지역 단체로는 함안 청년회와 함안 낙동 청년회의 참석이 확인된다.
[설립 목적]
함안 청년회는 품성 향상, 지식 계발, 체육 장려, 산업 발달, 풍속 개량의 5대 목표를 표방하면서 창립되었다. 당시 청년 운동의 기조가 항일 운동과 사상 개조에 역점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다른 함안 지역 청년회들[낙동 청년회, 칠원 청년회, 군북 청년회, 가야 청년회, 함안 기독 연합 청년회] 또한 비슷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변천]
1920년 설립된 함안 청년회와 함안 낙동 청년회가 활동할 시기에 칠원 청년회, 군북 청년회, 가야 청년회, 함안 기독 연합 청년회 등도 활동하고 있었다. 1925년 함안 청년회의 재창립과 가야 청년회의 혁신 총회 등은 이후 함안 지역 전체를 관장하는 함안 청년 동맹의 결성을 모색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함안 청년회는 지역 유지들의 발기로 1920년 7월 30일에 함안읍사립 안신 학교에서 설립되었다. 함안 청년회의 초기 임원진은 대부분 지역 유지나 사립학교 설립 관련자들로 구성되었고, 따라서 3·1 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안재휘(安在輝)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함안 청년회는 초기 구성원들이 가지는 한계 때문에 그 활동이 미미하여, 1925년 11월 변화를 모색하기 위한 혁신 총회를 거쳐 재창립되었다. 새롭게 창립된 함안 청년회는 신진 인사들을 대거 입회시켰다. 특히, 재결성 당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조진규(趙珍奎)와 조한휘(趙漢輝)는 이후의 신간회 함안 지회에서도 계속 활동하였다. 혁신 총회를 통해 새롭게 재창립된 함안 청년회는 각종 강연회와 음악회 등을 개최하였다. 함안 청년회의 이러한 활동은 1927년 함안 지역 전체의 청년 운동을 지도할 함안 청년 동맹 결성의 토대가 되었다.
군북 청년회는 설립 시기가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1923년 2월 군북 청년회의 임원으로 황금식, 조용관, 조용길, 손두옥, 김수홍, 이홍식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함안 지역에서 아주 이른 시기에 결성된 청년 단체인 것으로 보인다. 전후 사정을 감안해 보면, 아마도 함안 청년회와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군북 청년회는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1923년 100여 명에 달하는 학생 수에 비해 교실이 협소하여 임원 4명이 약 7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실을 증축하기로 협의한 기록이 확인된다. 가야 청년회는 1925년 함안 청년회의 재창립 영향으로 1926년 6월 6일 사회의 전환과 진화의 법칙에 따라 내용을 일층 혁신하기 위해 혁신 총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일제 경찰들의 간섭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고, 같은 해 10월 10일이 되어서야 가야 공립 보통학교 대강당에서 출석 회원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함안 낙동 청년회는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의 유지인, 김정오 외 7명이 발기하여, 1920년 8월 10일 오후 3시에 이령리에 있는 사립 경명 의숙 내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함안 청년회와 함께 조선 청년 연합회의 결성에 참여한 기록으로 보아, 함안 지역 청년 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함안 기독 연합 청년회는 1923년 3월 이홍식이 함안 기독 연합 청년회 부회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당시 모든 청년회가 운동회를 개최하고 야학을 운영하였다. 이는 지, 덕, 체의 삼육(三育) 중시 사상에 기반한 것이었다. 식민지 교육 체계 속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일반 아동, 여성들에 대한 야학 운영 또한 청년회의 주요 사업 중의 하나였다. 이는 당시 모든 청년회가 한말의 자강 운동에서 1910년대 비밀 결사 운동에 이르는 몇몇 지사들 중심의 독립적인 운동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들과 직접적으로 교류하고 함께 하는 대중 운동으로 활동 방식을 전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함안 지역 청년회들에서 실시한 주요 사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함안 청년회는 함안 보통학교 내에 야학회를 운영했으며, 주로 일어와 산술을 가르쳤고, 그 대상은 부인들과 남자 노동자들이었다. 야학 강습소의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인 극단의 순회공연과 계절별 각종 운동회도 개최하였다.
군북 지역이 3·1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곳인 만큼, 군북 청년회 또한 함안 청년회 못지않게 활동하였다. 군북 청년회의 주요 사업 중 하나였던 함창 강습소는 구체적 활동 사항은 파악되지 않지만, 함안 청년회의 야학회와 비슷한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함창 강습소의 재원 마련을 위해 군북 청년회도 소인 극단을 운영했으며 마산, 의령 등 인근 지역으로 순회공연도 하였다.
가야 청년회는 남선 척식 회사 농장이 가야면의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관련 가야 지역 농민의 경제 상태 조사를 제일 먼저 실시하였다. 그리고 조사 위원회와 연구회를 운영하면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소작 문제 등에 대해 직접 언급하였다. 함안 지역에 있었던 또 다른 청년회인 함안 낙동 청년회와 함안 기독 연합 청년회의 구체적인 활동 사항으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의의와 평가]
1920년대 초기 청년회의 주요 활동은 강연회와 토론회를 통해 일반 민중들을 계몽하는 운동뿐만 아니라 단주(斷酒) 동맹회 결성, 활동사진대와 연극 공연의 지방 순회, 노동 야학의 운영, 각 사회단체들의 연합 야유회 개최, 지방의 전통 놀이인 삭전(索戰) 대회 개최, 전염병 예방과 위생 관념의 고취, 시민들의 활동 공간이 될 수 있는 운동장 부지 확보, 봄·가을 대운동회 개최 등을 통한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마련에도 역점을 두었다. 아마도 함안 지역 청년회 활동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운동을 전개해 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20년대 전반기 각지의 청년 단체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1923년 3월부터 시작된 물산 장려 운동 및 민립 대학 설립 운동과 관련한 활동은 함안 지역 청년회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 청년회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거나 구성원들이 이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1920년에서 1923년 사이, 함안 청년회와 군북 청년회의 임원진들은 지역 유지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주 혹은 양조장을 운영하는 대자산가나 학교 설립 관계자들이 다수였다. 이에 비해 3·1 운동 참가자는 안재휘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편이었다.
이는 곧, 저항 엘리트는 소수인 반면, 지배 엘리트에 해당하는 계층이 초기 함안 지역 청년회 활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또한 함안 조씨(咸安 趙氏)가 임원의 다수였다는 점도 주요 특징의 하나였다. 특히, 읍이 아니었던 군북 지역에 청년회가 일찍 결성된 것도 조씨 가문이 군북 지역에 다수 거주했던 사실과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25년의 함안 청년회의 재창립과 가야 청년회의 혁신 총회 등을 통해 이를 해소하고자 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