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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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山洞廣谷-幸州奇氏世居地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호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에 있는 행주 기씨 세거지.
[개설]
행주는 본디 경기도 양주에 속하였던 고려 때 고을이름이다. 조선 초엽 고봉과 덕양을 합하여 고양이라 하였다. 그래서 광주광역시에 살면서 이름을 떨친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호가 고봉이다. 행주기씨들은 기자(箕子)의 48세손이 기순우(奇純祐)라는 주장이 있지만, 현존 기씨들은 기순우를 중조 기1세조로 하여 세계하고 있다. 기대승의 아버지 기진(奇進)은 기찬(奇禶)의 넷째아들이고, 다섯째아들이 기준(奇遵)[1492~1521]으로 응교로 있을 때 기묘사화를 입어 은성에 유배될 때 형제들이 모두 시골로 피신하였다. 기진의 형 기원(奇遠)은 장성으로 피신하였으나 기대승의 아버지는 어머니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르고 1530년 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신촌마을로 옮겨왔다. 기진의 처가가 진주강씨(晉州姜氏)로 이웃 영광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기대승을 광주 태생으로 말하지만 본디 고양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아버지를 따라 광주로 이사왔기 때문에 호를 태어난 고향 땅이름인 고봉이라 한 것이다. 기대승은 신촌에서 도동을 거쳐 너무실[廣谷]로 세 번 옮겼고, 3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 등을 지내고, 36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러나 기대승은 생전에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한 「종계변무주문(宗系辨誣奏文)」을 지어 중국의 기록을 바로잡은 공으로 사후 18년 만인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 녹훈과 함께 기대승이 살았던 동네 뒷산 백우산(白牛山)[293m] 일대 88정보[약 87만 2727㎡]를 사패지로 받아 후손들이 광곡을 중심으로 세거지를 삼았다
[명칭 유래]
행주기씨 일가가 처음 찾아든 곳은 본디 광주목 소고룡의 새터[신천]이었으나, 곧 두동으로 옮겨 살았다. 두동도 광주 지역으로, 장성군 남면 통정리와 경계 동네였다. 이 동네에서 4㎞쯤 북쪽으로 가면 황룡강 기슭에 광곡동네가 있다. 이 동네가 고봉 일가가 살던 오늘날의 광산동으로 본디 나주목 오산면에 속하였던 곳이다. 이 오산면이 1906년 함평군으로 이속되었다가 1914년 다시 나주군으로 돌려지면서 광곡만 떼어내어 광주군 임곡면에 소속시켰다. 이때부터 행주기씨가 살던 광곡이 광주에 속하게 된다.
[형성 및 변천]
동네 앞으로 호남선 철도와 국도 제53호선이 지나간다. 4㎞쯤 남쪽에 임곡역이 있고, 일제강점기에는 1920년 용진산금광이 개발되어 번성하였다.
입촌조 기진의 묘는 신룡동 두동에 있으며, 재각 오남재(吳南齋)가 있다. 기대승과 아들 기효증의 묘는 광산동 광곡에 있다. 오늘날 광곡에 있는 월봉서원은 고봉을 모시고 강학하기 위하여 1578년 지금의 신창동 월봉산 기슭에 초설하고, 1655년 사액을 받았으나 화재로 불타 1665년 신촌으로 이건하였다. 한말 서원철폐령 때 헐린 것을 1930년 광곡에 빙월당을 먼저 짓고, 1991년 빙월당 곁에 세 번째로 월봉서원[광주광역시 기념물]을 중건하였다. 광곡에는 기씨들 묘제를 지내는 귀후재, 두남재 등도 있으며, 기효정이 지었다는 칠송정(七松亭)도 복원되어 있다. 후손으로 대법원장을 지낸 기세훈이 세운 고봉학술원의 애일당(愛日堂)도 있다.
[현황]
광곡동네 45집 가운데 37집이 행주기씨들이다. 광주광역시 내에 3,740명이 살고 있다. 서창동에 있던 문중 땅이 택지개발로 수용되면서 20여 억 원의 보상금을 받아 쌍촌동에 5층 회관을 마련하여 행주기씨 문헌공파 종중문회가 운영하고 있다. 월봉서원의 빙월당에서는 인문학 강의 등 행사가 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