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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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義允 |
영어공식명칭 | Kwon Euiyoon |
이칭/별칭 | 권종태(權鍾泰)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시기/일시 | 1868년 3월 7일 - 권의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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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8일 - 권의윤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참가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8일 - 권의윤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 6월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42년 2월 28일 - 권의윤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권의윤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대신동 -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
거주|이주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계성학교 교사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권의윤(權義允)는 1868년 3월 7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서 태어났다. 계성학교(啓聖學校) 교사로 재직 중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권종태(權鍾泰)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활동 사항]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확산되자 대구에서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鄭在淳)과 장로 정광순(鄭光淳),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洪宙一),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金永瑞)를 비롯한 교사 권의윤·백남채(白南採)·김태식(金台植)·최경학(崔敬學)·최상원(崔相元),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임봉선(林鳳仙)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권의윤은 계성학교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하며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8일 이만집의 연설과 김태련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서문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계성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합세하여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1,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권의윤은 이때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았다. 권의윤은 1942년 2월 28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권의윤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