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0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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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澹 |
영어공식명칭 | Heo Dam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허담(許澹)[1886~1972]은 1886년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에서 태어났다. 대구 성경학교(聖經學校)에서 강습을 받고 있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허담은 1919년 1월 경주 안강 지역의 전도사로 있다가 대구 성경학교 강습생으로 등록하였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 만세 시위 이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확산되고 있을 때 장로파 예수교회 조사 이태학(李泰鶴)이 만세 시위를 확산하기 위하여 대구로 내려왔다. 3월 7일 성경학교 기숙사에서 학생들에게 만세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는데, 이미 성경학교 강습생들은 3월 8일의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결정한 상황이었다.
1919년 3월 8일 허담은 성경학교 강습생 20여 명과 함께 서문시장으로 집결하였고, 오후 3시 이만집의 연설과 김태련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계성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합세하여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1,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허담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도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허담은 출소 이후 목회 활동에 전념하였으며, 광복 후인 1945년 10월 1일 경상북도 경주시에 문화고등여학원[현 문화중학교·문화고등학교]을 설립하였다. 허담은 1972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허담의 공적을 기려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