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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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武生 |
영어공식명칭 | Kim Musae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시기/일시 | 1898년 7월 9일 - 김무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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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8일 - 김무생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8일 - 김무생 대구 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71년 - 김무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무생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사월동 - 대구광역시 수성구 사월동 |
학교|수학지 | 숭실학교 - 북한 평양특별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무생(金武生)[1898~1971]은 1898년 7월 9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사월동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활동 사항]
김무생은 1919년 숭실학교 재학 중 평양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고, 3월 7일 김천에서 김천예수교회 전도사 박제원(朴齋元)을 만나 대구 지역의 만세 시위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이후 대구로 내려와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崔相元),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 허범(許範)·신현욱(申鉉旭),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임봉선(林鳳仙) 등을 만나 서울과 평양의 만세 시위 상황을 전하고 대구 지역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하였다.
1919년 3월 8일 오후 3시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의 연설과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대구 지역의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대구 성경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1,000여 명에 이르는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김무생도 이때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무생은 1971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무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