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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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輓詞[鄭光天] |
영어공식명칭 | Mansa[Jung-Gwangchu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3년 - 「만사」[정광천] 저자 정광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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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594년 - 「만사」[정광천] 저자 정광천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59년 - 『계동집』 간행 |
배경 지역 | 계동선생유적비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
성격 | 애제류|만사 |
작가 | 정광천 |
[정의]
조선 전기 학자이자 의병장인 정광천이 대구 출신 문신 전경창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만사.
[개설]
「만사」[정광천] 저자 정광천(鄭光天)[1553~1594]의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자회(子晦), 호는 낙애(洛涯)·송파(松坡)이다. 아버지는 정사철(鄭師哲)[1530~1593],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 이호연(李浩然)의 딸이다. 대구부 하빈현 동곡리[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동곡리] 출신이다.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며, 서사원(徐思遠)[1550~1615], 주신언(朱愼言)[1539~?] 등과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에 있는 부인사(符仁寺)에서 지역의 인사들이 향회를 열어 의병을 결성하고, 하빈현 남면장(南面將)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경창(全慶昌)[1532~1585]의 본관은 경산(慶山)이며, 자는 계하(季賀), 호는 계동(溪東)·만오(晩悟)이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인 문평공(文平公) 전백영(全伯英)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전순(全珣)이고, 어머니는 김해송씨(金海宋氏) 송식(宋軾)의 딸이다. 대구부 수성현 파잠리(巴岑里)[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났다. 이황(李滉)[1501~1570]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관직은 검열·정언에 이르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계동집(溪東集)』이 있다.
[구성]
「만사」[정광천]는 68행으로 이루어진 부(賦)이다.
[내용]
「만사」[정광천]는 내용상 서·본문·결어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서 부분은 전경창의 성품을 찬양하며, 고고(高古)하고 박약(博約)한 학문 세계와 관직에서 정성스러움을 다한 전경창의 치적을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 본문 부분은 전경창을 앗아 간 하늘을 원망하고, 운구 행렬 속에서 탄식과 죽음에 대한 슬픔을 드러내고 있다. 세 번째 결어 부분은 전경창을 항상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배우지 못한 아쉬움과 전경창이 장수를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글을 마무리하였다.
[특징]
「만사」[정광천]는 ‘부’의 형식으로 지은 만사이다. 정광천의 문집에는 제문(祭文)으로 분류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만사」[정광천]는 평측을 정연하게 사용하지 않았지만 ‘혜(兮)’를 적절히 사용하여 운율성을 높였고, 문부(文賦)의 형식을 조화롭게 사용하여 슬픔에 대한 정서를 명확하게 전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