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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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啓狀 草稿-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71년 - 조진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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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93년 - 서희순 출생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834년 - 「갑오년 정월 모일에 대구부에서 감영에 보고한 문서」 조진민 창작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834년 - 「갑오년 모월 모일 순찰사의 계문 초고」 서희순 창작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841년 - 「신축년 2월 모일 정려할 당시 예조의 회계」 서희순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57년 - 서희순 사망 |
배경 지역 | 산격동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
배경 지역 | 서명보 효자 정려각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
성격 | 상소류|계장 |
작가 | 조진민|서희순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출신인 효자 서명보의 증려를 위하여 조진민과 서희순이 1834년과 1841년 올린 계문.
[개설]
계장 초고 뒤에 붙이는 글은 조선 후기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출신인 효자 서명보의 증려를 위하여 조진민과 서희순이 올린 계문이다. 서명보(徐命普)[1704~1778]의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가 화극(華極)이며, 호가 북곽(北郭)이다. 아버지는 서익지(徐翊祉)이고, 어머니는 오산김씨(鰲山金氏) 김억추(金億秋)의 딸이다. 서명보는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효성스럽고 근신하였다. 일곱 살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아버지가 중풍에 걸린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지극하게 아버지 병환을 돌보았다. 대구 지역 유생(儒生)과 암행어사, 관찰사가 계장(啟狀)을 지어 올린 덕분에 1799년(정조 23) 통훈대부 공조좌랑(通訓大夫工曹佐郎)에 추증되었고, 1841년(헌종 7) 정려(旌閭)를 하사받았다. 저서로 『북곽실기(北郭實記)』가 있다.
조진민(趙鎭敏)[1771~?]의 본관은 양주(楊州)이고, 자는 사눌(士訥)이다. 조선 후기 지방관으로 목사를 지냈다. 아버지는 조원철(趙元喆), 생부는 견진익파(見鎭翼派) 조종철(趙宗喆)이다.
서희순(徐憙淳)[1793~1857]의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는 치회(穉晦)이며, 호는 우란(友蘭)이다. 시호는 숙헌(肅獻)이다. 1833년(순조 33)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고, 1841년에는 예조판서를 지냈다.
[구성]
계장 초고 뒤에 붙이는 글은 조진민의 「갑오년 정월 모일에 대구부에서 감영에 보고한 문서[甲午正月日 本府報營狀]」와 서희순의 「갑오년 모월 모일 순찰사의 계문 초고[甲午年月日 巡察使啟聞草]」, 「신축년 2월 모일 정려할 당시 예조의 회계[辛丑二月日 旌閭時 禮曹回啟]」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계장 초고 뒤에 붙이는 글 세 편은 서명보의 효행을 알리는 글이며, 정려를 내려 주기를 청하는 글이다. 조진민의 「갑오년 정월 모일에 대구부에서 감영에 보고한 문서」는 서명보의 지극한 효행을 알 수 있는 일화를 내세워 정려를 내려 주기를 청하는 글이다. 서희순의 「갑오년 모월 모일 순찰사의 계문 초고」는 경상도관찰사로 내려왔을 때 쓴 글이며, 서명보의 효성을 간명하게 설명하며 표창(表彰)을 청하는 1834년의 글이다. 「신축년 2월 모일 정려할 당시 예조의 회계」는 정려가 하사된 1841년에 쓴 글이며 임금의 물음에 대하여 서희순이 답하여 올린 문서이다.
[특징]
계장 초고 뒤에 붙이는 글은 편집자가 『북곽실기』를 편집하면서 중요한 세 편을 분류하여 항목에 편성한 것이다.
[의의와 평가]
계장 초고 뒤에 붙이는 글은 조선 후기 정려를 위한 과정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