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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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明普 孝子 旌閭閣 |
영어공식명칭 | Seomyeongbo Hyoja Jeongnyeogak |
이칭/별칭 | 서명보 효자각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7길 9[산격동 1134-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일주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802년 - 서명보 효자 정려각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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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서명보 효자 정려각 -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7길 9[산격동 1134-1] |
성격 | 정려각 |
양식 | 맞배지붕|백골집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달성서씨 현감공파 문중 |
관리자 | 달성서씨 현감공파 문중 |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정려각.
[개설]
서명보 효자 정려각(徐明普 孝子 旌閭閣)은 숙종 때 효자인 서명보[1704~1778]의 효행을 기리고자 1802년(순조2)에 건립된 정려각이다. ‘서명보 효자각’이라고도 일컫는다. 서명보는 본관이 달성(達城)이며, 자는 화극(華極)이고 호는 북곽(北郭)이다. 서명보는 아버지 서익지(徐翊祉)의 병이 깊어 24년간 간병하였는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아버지에게 피를 주었다고 하며, 이러한 효심 덕분인지 부엌에 꿩과 비둘기가 날아들고 얼어붙은 하천에서 잉어를 구하는 등의 이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아버지를 간병하는 동안 매일 변화하는 아버지의 상태와 그날의 탕약 종류 등을 세세하게 기록한 일지인 『시탕록(侍湯錄)』를 남겼고, 『시탕록(侍湯錄)』을 조정에서 읽고 감명하여 1799년(정조 23) 통훈대부공조좌랑(通訓大夫工曹佐郞)을 증직하였다.
[위치]
서명보 효자 정려각은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1134-1에 있으며, 구계서원(龜溪書院) 앞쪽 아래 언덕에 있다.
[변천]
서명보가 죽고 나서 대구 지역, 또는 영남 지역의 선비들이 대구부와 경상감영 등에 효자 정려를 여러 차례 청원하였다. 서명보 사후 5년 뒤인 1783(정조 7), 고을의 선비 이익룡(李翼龍) 등이 대구부에 효자정려를 처음 청원하였다. 1787년(정조 11)에 역시 향유(鄕儒) 이시채(李時采) 등이 경상감영에 청원을 하였으며, 1797년(정조 21)에도 향유 전필방(全弼邦)·도술모(都述謨), 이춘섭(李春燮) 등과 경상도의 유림 정하직(鄭夏溭), 여경(呂㯳) 등이 경상감영에 효자정려를 청원하였다.
1799년 비로소 공조좌랑에 증직되어 사당에 분황하였다. 조정으로부터 효자 정려가 내려온 것은 1841년(헌종7)이다. 「정려각중건기」에는 정조(正祖) 때 효자 정려가 내린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정려 편액에 ‘상지칠년신축(上之七年辛丑)’으로 적힌 것으로 보아 1841년(헌종7)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후 몇 번의 이건을 거쳐 현재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
[형태]
서명보 효자 정려각의 건축양식은 정면1칸·측면1칸이며, 정면은 홍살[철제]이고 측면과 배면은 흙벽이다. 맞배지붕에 단청이 없는 남향 백골집이다. 서명보 효자 정려각 내부에는 정려 편액·정려비·「정려각이건기」·「효자비중수기(孝子碑重竪記)」 등이 있다.
[현황]
서명보 효자 정려각은 달성서씨 현감공파 문중에서 관리하여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서명보 효자 정려각 앞에 달성서씨 현감공파 재실인 용담재(龍潭齋)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