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4074 |
---|---|
한자 | 李潑 |
이칭/별칭 | 경함(景涵),동암(東巖),북산(北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양화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巖)·북산(北山)이다. 증조부는 이달선(李達善), 할아버지는 이공인(李公仁), 아버지는 이중호(李仲虎)이다. 외조부는 윤구(尹衢)이고, 부인은 박이(朴苡)의 딸이다.
[활동사항]
전라남도 남평에서 출생하였다. 1568년[선조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년 문과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이조정랑·장령·응교·전한·부제학을 거쳐 1584년에 대사간에 이르렀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 분기할 때 이조정랑에 임명되어 가까운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으며, 동인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특히 서인을 이끌던 정철(鄭澈)과 크게 대립하였다. 그러나 상황을 대국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이(李珥)가 그의 사람됨을 인정하고 붕당간의 갈등을 해결하자고 호소하였으며 끝까지 그를 끌어 쓰려 한 데서 나타나듯이, 권력투쟁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된다. 그 후 정철의 처벌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이·성혼(成渾)과도 입장이 다름을 명확히 하였다.
1589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남을 계기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교외에서 대죄(待罪)하던 중 잡혀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장살(杖殺)되었다. 그가 죽은 뒤 82세의 노모와 8세의 아들도 엄형(嚴刑)으로 죽었는데, 그 노모는 형벌이 너무 지나치다고 꾸짖으면서 끝내 역모에 관한 일을 승복하지 않았으며, 문생·노비도 모두 엄형을 가하였으나 승복하는 자가 없었다.
[학문과 사상]
김근공(金謹恭)·민순(閔純)에게 배웠으며, 최영경(崔永慶)·홍가신(洪可臣)·김우옹(金宇顒) 등과 친했다.
[묘소]
묘소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선조와 광해군 때 여러 차례 신원하자는 요청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1624년(인조 2) 이원익(李元翼)의 건의로 신원되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
2019.05.10 | 행정지명 현행화 | 모현면에서 모현읍으로 변경 사실 반영 |
2012.01.17 | 이발의 간략정보 및 참고문헌 수정 | 조선 전기 문신 '이발'과 조선 중기 문신 '이발' 두 명이 존재하고 있음. 내용 확인 후,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이발'의 내용으로 수정함. 수정전 수정후 1. 생년: 1372년 1544년 2. 몰년: 1426년 1589년 3. 본관: 성주 광산 4. 대표관직: 병조판서 대사간 5. 시대: 조선 전기 조선 중기 6.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세종35권, 9년 2월19일 선조실록, 연려실기술 이발묘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