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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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Yongin Jiyeok Bunmyoe Natanan Seongmurui Teukjing |
영어의미역 | Characteristic Features of the Monumental Stones at the Tombs in the Yongin Reg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주홍 |
[개설]
조선의 대표적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권3 예전(禮典) 상장조(喪葬條)에는 “경성에서 10리 이내와 인가의 백 보 내에는 매장하지 못한다.”는 분묘에 대한 규정이 있었다. 오늘날 용인을 비롯한 서울 근교에 조선시대 명신들의 분묘가 다수 잔존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으로, 특히 용인 지역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인간의 사후 음택인 분묘가 조성되기에 가장 좋은 길지로 선호되고 있는 곳이다.
이들 분묘에는 다양한 종류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석물이란 분묘의 봉분을 조성할 때 설치되는 각종의 석조물(石造物)로, 혼유석·상석·고석·향로석·계체석·망주석·문인석·무인석·동자석·장명등·양석·호석·마석·신도비·묘갈·묘표 등을 말한다. 석물은 피장자의 신분에 따라 배치하는 방향이나 규모가 달라서, 이들 석물들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내면적인 사상과 의식 외에도 각종 묘비 등을 통해 중요한 금석학적 자료를 얻을 수 있다.
[분묘와 석물의 현황]
1. 처인구
처인구는 행정구역상 용인시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 분묘와 석물 역시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지역별로 묘역의 현황을 살펴보면 능원리에는 영일정씨·연안이씨, 오산리에는 해주오씨, 매산리에는 용인이씨, 초부리에는 의령남씨, 양지리에는 나주정씨, 제일리에는 연안이씨, 식금리에는 고령박씨, 송문리에는 전주유씨, 신원리에는 청주이씨, 전대리에는 나주정씨, 마성리에는 한양조씨, 죽릉리에는 해주오씨, 맹리에는 양천허씨, 문촌리에는 전주이씨, 학일리에는 함안조씨, 묵리에는 청해이씨, 천리에는 우봉이씨, 완장리에는 전주최씨, 옥산리에는 죽산박씨, 석천리에는 문화류씨의 묘역이 분포하고 있다.
처인구에 있는 주요 분묘는 약 70개 소로, 가문별로 보면 영일정씨·연안이씨·해주오씨·용인이씨·의령남씨·나주정씨·고령박씨·전주유씨·청주이씨·한양조씨·양천허씨·함안조씨·전의이씨·진주유씨·청해이씨·우봉이씨·여흥민씨·여양진씨·죽산박씨·문화유씨·평강채씨 등 약 22개 문중이다. 이중 입향 시기가 가장 빠른 가문은 영일정씨로 추정되며, 그 다음이 청주이씨와 연안이씨의 순이다.
이들 분묘에 세워져 있는 석물을 보면, 문인이나 여성인 경우에는 보통 한 쌍의 문인석이 배치되는데, 드물게 두 쌍의 문인석이 배치되거나 문·무인석이 동시에 배치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포곡면 신원리에 있는 이애(李薆)[1363~1414]의 묘와 경신공주(慶愼公主)의 묘에는 고려시대의 문·무인석이 동시에 배치되어 있다. 모현읍 능원리에 있는 정종선과 이석형(李石亨)[1415~1477]의 묘에는 조선 전기 양식인 복두공복형(幞頭公服形) 문인석 두 쌍이 세워져 있다. 이중 정종선의 묘에 있는 문인석은 복두의 후면 각(脚)이 U자 모양이다.
모현읍 능원리에 있는 오명항(吳命恒)[1673~1728]의 묘에는 묘주의 신분이 문인임에도 무인석이 세워져 있다. 이는 오명항이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기 때문인 듯하다. 이에 반해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이숙기(李淑琦)[1429~1489]의 묘에는 묘주의 신분이 무인임에도 복두공복형의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이동읍 천리의 이만창(李晩昌)[1654~1684]과 이만성(李晩成)[1659~1722]·이재(李縡)[1680~1764]의 묘 앞에 있는 문인석은 조복의 후면에 운학문(雲鶴紋)이 표현되어 있어 흥미로운데, 의문(衣紋)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다.
동자석(童子石)은 해주오씨·나주정씨·한양조씨·양천허씨·함안조씨·전주최씨·죽산박씨 등 일곱 개 문중의 묘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중 해주오씨·양천허씨 문중 묘역에서 특히 많이 확인되는데, 오윤겸(吳允謙)[1559~1636]의 묘 앞에 있는 동자석은 왼손으로 오른손을 덮고 작은 홀을 쥔 채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앳된 모습으로 한대(漢代)의 복장을 하고 있다. 오희문(吳希文)[1539~1613]의 묘에 있는 동자석의 경우 하체부 의습선과 팔(八)자 모양으로 길게 늘어뜨린 허리띠와 매듭의 장식이 우수하다. 반면 오달천·오도종·오도륭(吳道隆)·오수량·오명항(吳命恒)[1673~1728]의 묘에 있는 동자석의 경우 금관조복에 홀을 들고 있는 문인석의 형태이다.
이외에도 정3품 이상의 품계와 관직을 지낸 자에 한해 건립이 가능했던 장명등은 해주오씨·청주이씨·양천허씨·죽산박씨 등 네 개 문중의 묘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동읍 천리의 나주박씨[1631~?] 묘역에는 연봉 부분에 좌상(左上)·우상(右上)의 형태로 세호(細虎)가 조각된 망주석이 세워져 있다.
양석(羊石)의 경우 원삼면 학일리에 있는 조중회(趙重晦)[1711~1782]의 묘와 이동읍 시미리의 민규호(閔奎鎬)[1836~1878]의 묘, 역북동의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묘에서 확인되는데, 모두 풍만한 몸체에 C자 형의 뿔이 조각되어 있다. 이에 반해 원삼면 문촌리에 있는 이주국(李柱國)의 묘에는 좌측에는 양석(羊石)이, 우측에는 마석(馬石)이 각 한 기씩 배치된 특이한 형태이다.
처인구에 있는 묘비 중에 특별하게 눈에 띄는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현읍 초부리의 남구만(南九萬)[1629~1711] 묘에 있는 묘표는 팔작지붕형의 옥개석 상단 용마루 좌우에 해태를 조각하였는데, 등 부분이 서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둘째, 포곡면 영문리에 있는 완산이씨 묘의 묘표는 방부이수형(方趺螭首形)으로 전면에는 이수, 후면에는 운문이 조각되어 있다. 셋째, 원삼면 죽능리에 있는 오희보(吳希保) 묘의 묘표는 우진각옥개석으로 전체에 기와골이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넷째, 원삼면 문촌리에 있는 이함 묘의 묘갈은 팔작지붕 옥개석 마루에 귀면(鬼面)의 문양이 조각되어 있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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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구 소재 주요 분묘 및 석물
2. 기흥구
행정구역상 수원시와의 경계이자 용인시의 서쪽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기흥구에는 약 25개 소의 주요 분묘가 있는데, 지곡리 일대의 한산이씨, 공세리 일대의 전주최씨, 영덕리 일대의 용인이씨, 마북리 일대의 여흥민씨, 청덕리 일대의 남원윤씨 묘역 등이 대표적이다.
기흥구에 세거하고 있는 한산이씨·해주오씨·전주최씨·덕수이씨·용인이씨·여흥민씨·풍양조씨·남원양씨 중 입향 시기가 가장 빠른 가문은 용인이씨로서 이중인(李仲仁)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그 다음으로 기흥구에 정착한 문중이 전주최씨로, 대표적인 인물이 최유경이다. 최유경(崔有慶)은 여말선초에 전주최씨를 중흥시킨 인물로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원종공신에 책록되기도 하였다.
이들 문중의 묘역에는 다수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신분상 문인이나 여성이 많은 까닭에 무인석은 한 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문인석은 거의 모든 묘역에 세워져 있는데, 상하동에 있는 연안부부인 전씨[1421~1500] 묘의 문인석은 15세기 후반경에 조성된 복두공복(幞頭公服) 문인석 중 수작으로 꼽힌다. 역시 상하동에 있는 풍창부부인 조씨[1659~1741] 묘의 문인석은 복두공복의 문인석 양식에서 한층 더 발전한 양관조복형(梁冠朝服形) 문인석 중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동자석(童子石)은 이출·최노첨·최사규·이경증(李景曾) 등 한산이씨와 전주이씨·덕수이씨 가문의 묘역에서만 확인된다. 이들 묘주의 졸년(卒年)으로 미루어 동자석들은 15세기 초에서 17세기 중엽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정3품 이상의 품계와 관직을 지낸 자에 한해 건립이 가능했던 장명등(長明燈)은 전주최씨 묘역에서 일부 확인되며, 여흥민씨와 남원윤씨 묘역에서도 소량이 확인되었다.
양석(羊石)은 윤염(尹琰)의 묘에서 유일하게 한 쌍이 확인되는데, 몸통 전체에 돌이끼가 끼어 있다. 표현양식상 긴 뿔이 귀 부분을 반월 모양으로 돌아 감싸고 있고, 배 부분은 불룩하게 아래로 처져 있다. 엉덩이 부분의 짧은 꼬리는 동그랗게 말아 올렸으며, 양석마다 두 다리 사이의 성기를 표현함으로써 수컷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기흥구에 있는 분묘의 묘비 중 특이한 것으로 윤유곤 묘의 묘표를 들 수 있는데, 묘표 관석의 앞면 중앙부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원형과 주위로 운문을 새겨 놓았으며, 뒷면에는 형태를 알 수 없는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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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흥구 소재 주요 분묘 및 석물
3. 수지구
행정구역상 용인시의 남쪽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수지구는 근래 들어 도시개발이 급속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지역별로 묘역의 현황을 살펴보면 죽전리 일대에는 경주김씨, 상현리 일대에는 한양조씨, 고기리 일대에는 장수이씨·덕수이씨·창원황씨, 성복리 일대에는 성주이씨 묘역 등이 분포하고 있으며, 주요 분묘는 약 10개소 정도이다. 현재 수지구에 세거하고 있는 문중은 경주김씨·한양조씨·장수이씨·창원황씨·성주이씨 등으로, 이중 입향 시기가 가장 빠른 문중은 성주이씨이고, 다음이 경주김씨이다.
이들 문중의 묘역에는 다수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신분상 문인이 대부분이어서 문인석이 많이 발견되지만 장수이씨와 덕수이씨 문중의 묘역에서는 무인석도 확인되었다. 이중 본관이 장수인 이종무(李從茂)는 무인임에도 묘역에는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어 묘주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석물 배치를 보이고 있다. 동자석의 경우 김득곤과 이부 등 경주김씨·성주이씨 두 가문의 일부 분묘에서만 확인되지만, 묘주의 졸년이 불명확하여 입석 시기는 알 수 없다. 이중 본관이 성주인 이구의 묘 동자석은 두 손을 맞잡아 홀을 쥐고 있는데, 손가락의 표현이 없이 얼굴 모습은 다른 동자석에서 볼 수 없는 노인(老人)의 표정을 짓고 있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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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구 소재 주요 분묘 및 석물
[분묘의 석물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징]
1. 신도비
신도비는 뚜렷한 공적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가 될 만한 기록을 비신에 새기어 후세에 영원히 남기기 위해 세우는 석물이다. 풍수지리설에서 묘의 동남쪽을 신도(神道)라고 하기 때문에 대개 묘역의 동남쪽에 세운다. 따라서 신도비는 후세에 사표가 될 만한 기록을 영구히 남기는 역할과 함께 묘의 위치를 안내하는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하는 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도비는 다른 묘비와 달리 건립에 제한이 있어서, 묘주(墓主)가 생전에 종2품 이상의 관직과 품계를 갖추었거나, 사후에 추증받은 증직이 종2품 이상이어야 건립이 가능했다. 또한 묘주가 신도비를 건립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해도 원래 비석의 규모가 커서 한 번 세우는 데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묘주의 사후에 단기간에 즉시 건립되어지는 경우는 드물었으며, 처인구에 있는 오윤겸 묘의 경우처럼 묘주가 신도비를 세울 만한 자격이 있었으나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내려서 후손들이 대신 묘갈을 세우기도 하였다.
신도비는 다른 묘비와 달리 규모의 거대함과 묘역의 동남쪽에 위치하는 특성 외에 비신 앞면 비제(碑題)의 서두에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으로 시작하여 이하 관직명이 열거되고, 말미에 ‘신도비명병서(神道碑銘幷序)’ 혹은 ‘신도비명(神道碑銘)’으로 종결되어지므로 다른 비와의 구분이 용이하다. 또한 비제에 이어 찬(撰)·서(書)·전자(篆字)가 새겨지는데, 이중 찬자는 비의 대상자가 자술한 경우가 드물게 확인되고 있으나 대부분 후손과 관직 동료, 문인, 친구 등 평소 묘주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한 자가 찬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에 반해 서·전자는 후손들이 당대의 명필가에게 부탁하여 쓰여졌으며, 찬자와는 달리 비의 예술성을 담당하였다.
현재 용인 지역에는 약 25기 가량의 신도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근래 급속한 도시개발 과정에서 다른 지방으로 이건된 경우도 있고, 해방 이후에 건립한 것을 제외하면 실제 전통시대에 세워진 신도비는 18기 가량으로 볼 수 있다. 소재지별로는 처인구에 15기가 있고, 수지구에 2기, 기흥구에 1기가 있다. 입석 문중 별로 살펴보면 죽산박씨 1기, 양천허씨 2기, 나주정씨 4기, 한양조씨 1기, 연안이씨 2기, 우봉이씨 2기, 덕수이씨 1기, 전주이씨 1기, 경주김씨 1기, 영일정씨 2기, 현풍곽씨 1기 등 모두 11개 가문의 묘역에 1기~4기씩의 신도비가 입석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또한 처인구 원삼면에 있는 이주국 묘를 제외하면 모두 문인 묘이다.
이들 중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것은 박원형(朴元亨)의 신도비로, 15세기 말경 죽산박씨 문중에서 박원형의 사후 2년 만에 입석하였다. 이후 16세기 말경에 나주정씨·한양조씨 문중에서 각 1기, 17세기에 나주정씨·연안이씨·우봉이씨·영일정씨 문중에서 각 1기, 18세기에 나주정씨·우봉이씨·영일정씨·덕수이씨 문중에서 각 1기, 19세기에 전주이씨·나주정씨·경주김씨 문중에서 각 1기가 세워졌다. 또한 해방 이전까지도 현풍곽씨와 연안이씨 문중에서 꾸준하게 입석되었는데, 이를 통해 조선 전 기간에 걸쳐 용인 지역의 10개 주요 문중에 의해 소량씩이나마 비의 건립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용인 지역의 신도비 중 묘주의 사후 최소 2년 안에 건립된 경우는 3기(박원형·허엽·이주국 신도비)에 불과하다. 묘주가 죽은 지 6년(이유겸 신도비)이나 8년(정덕징 신도비) 만에 건립된 경우도 있는가 하면 김세필 신도비는 사후 325년 만에 세워지기도 하였다. 참고로 용인 지역에 있는 18기의 신도비는 묘주의 생몰연도가 불분명한 2기(곽원진·이원발 신도비)를 제외하면 묘주의 사후 평균 103년 만에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양식면으로 보면 비좌와 비신 상부가 반달 모양의 방부원수형(方趺圓首形)이 3기, 비좌와 비신 및 팔작지붕 옥개석을 갖춘 방부개석형(方趺蓋石形)이 15기이다.
다음은 비문의 찬·서·전자와 관련한 사항으로, 찬자(撰者)는 이승소·노수신·홍섬·정경세·이정구·송시열·남구만·이재·권상하·송환기·이준·이민구·곽찬·이병관 등 14인에 의해 찬하여졌다. 이중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이유겸(李有謙)·정몽주(鄭夢周)·김세필(金世弼) 등 3인의 신도비문을, 노수신(盧守愼)[1515~1590]은 허엽·조광조(趙光祖) 등 2인의 신도비문을, 이재(李縡)[1680~1764]는 이만성(李晩成)·정덕징(鄭德徵) 등 2인의 신도비문을 찬하는 데 관여하였다.
서자(書者)는 이를 새기지 않은 1기를 제외하고 한호·이산해·신익성·송준길·김수증·남구만·민우수·김진상·윤양후·이재의·윤필병·김도희·허창·이의국·이만녕 등 15인에 의해 주로 서하여졌다. 이중 한호(韓濩)[1543~1605]는 서자 중 유일하게 허엽·정옥형(丁玉亨) 등 2인의 신도비문을 서하는 데 관여하였다.
전자(篆者)는 이를 새기지 않은 4기를 제외하고 남응운(南應雲)[1509~1587]·김응남·김상용·민유중·김수항·최석정·유척기·남유용·유한지·윤필병·곽영민·윤용구 등 12인이 주로 전액하였다. 이중 남응운은 허엽·정옥형 등 2인의 신도비문을, 유척기(兪拓基)[1691~1767]는 이만성·정덕징 등 2인의 신도비문을 찬하는 데 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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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건립 묘역(입석순: 1945년 기준)
2. 묘갈
묘갈(墓碣)의 건립 목적은 신도비와 같다. 다만 묘역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서 세워지는 신도비와 달리 봉분의 중앙이나 좌·우 등 봉분과 가까운 곳에 세워지며, 신도비와 달리 정3품 당상관 이하 관직자가 입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 묘표와 달리 비신에 새겨지는 묘주의 생평사적을 기록하는 비문을 찬하거나 혹은 서(書)하고 전액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신도비를 건립할 수 있는 자격에 못 미치는 중간 관료급이나 경제력을 갖춘 신분층에서 건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묘갈 역시 신도비와 마찬가지의 요인으로 인해 묘주의 사후 단기간에 만들어서 세워지지는 않았다. 용인 지역에 있는 묘갈 중 입석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은 조행립과 이수민(李壽民) 등 2인의 묘갈인데, 두 기 모두 묘주의 사후 7년 만에 세워졌다. 이예견 묘갈의 경우 사후 253년 만에 세워진 경우이다. 참고로 용인 지역 묘갈의 입석 시기는 평균 79년이었다.
묘갈은 비신 갈제(碣題)의 서두에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으로 시작되어 이하 관직명이 열거되고, 말미에 ‘묘갈명병서(墓碣銘幷序)’ 혹은 비신 상부에 새겨진 ‘묘갈명(墓碣銘)’·‘묘갈(墓碣)’ 등의 전액을 통해 일반 묘표와 구분된다. 또한 갈제에 이어 찬·서·전자가 새겨지는데, 간혹 새기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현재 용인 지역에는 약 23기 가량의 묘갈이 있는데, 이는 이원준·한현모 묘갈처럼 타 시군에서 용인 지역으로 이건한 묘갈을 포함한 수치이다. 소재지별로는 처인구 15기, 기흥구 6기, 수지구 2기로서 처인구에 대다수가 소재하고 있다. 생몰년과 본관이 불분명한 7기를 제외하면 고령박씨 1기, 청주한씨 2기, 한산이씨 2기, 전주이씨 1기, 청해이씨 2기, 연안이씨 1기, 성주이씨 1기, 파평윤씨 1기, 양천허씨 1기, 해주오씨 1기, 창녕조씨 1기, 전주유씨 1기, 여흥민씨 1기 등 모두 13개 가문의 묘역에 1기~2기씩의 묘갈이 입석되어 있다. 묘주의 신분은 처인구에 묘소가 있는 이빈(李贇)을 제외하면 모두 문인이며, 여성도 한 명 있다.
용인 지역에 세워진 묘갈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세종 대인 15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고령박씨와 청주한씨 문중에서 입석한 박수림과 청주한씨의 묘갈이다. 이후 16세기 초와 말경에 정씨·한산이씨·파평윤씨 문중에서 각 1기, 17세기에는 전주이씨·양천허씨·해주오씨·연안이씨·성주이씨·창녕조씨 문중에서 1기씩, 18세기에는 청해이씨·한산이씨 문중에서 1기씩, 19세기에는 청주한씨·청해이씨·전주유씨·여흥민씨 문중에서 1기씩 꾸준하게 입석되었다. 이중 묘갈의 입석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는 17세기로, 총 23기 중 8기가 입석되었다. 묘갈의 입석 시기가 확실한 16기 중 묘주의 사후 7년 안에 세워진 경우가 2기(조행립·이수민 묘갈), 9년인 경우가 1기(이원준 묘갈), 11년인 경우가 1기(오윤겸 묘갈)이다.
양식면에서는 비신의 상부가 평면으로 되어 있고 양쪽 모서리를 각을 주어 깍은 방부규수형(方趺圭首形)이 2기, 비신과 일석(一石)인 개석(蓋石)이 연꽃잎을 뒤집어 놓은 형태인 복연(覆蓮)을 형상화한 방부하엽형(方趺菏葉形)이 1기, 비신 상부가 반달 모양의 방부원수형(方趺圓首形)이 8기, 팔작지붕 옥개석을 갖춘 방부개석형(方趺蓋石形)이 10기, 비신 상부의 개석을 뿔이 없는 용(龍), 즉 이무기를 조각한 방부이수형(方趺纚首形)이 1기이다. 용인 지역에는 이렇듯 모두 다섯 가지 형태의 묘갈 양식이 현존하고 있는데, 이중 대다수는 방부개석형과 방부원수형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찬·서·전자와 관련된 사항을 보면, 찬자는 성세창·정사룡·김장생·최명길·김상헌·조경·정유성·송시열·이재·임희성·유순·조현명·황경원·남유용·김상정·유정권·김영수 등 17인에 의해 주로 찬하여졌다. 이중 송시열은 조행립·이원준 등 2인의 묘갈 비문을, 김상헌(金尙憲)[1570~1652]은 오윤겸(吳允謙)·이시직(李時稷) 등 2인의 묘갈 비문을, 이재는 이수민·정준(鄭儁) 등 2인의 묘갈 비문을 찬하는 데 관여하였다.
서자는 묘갈에 각자되지 않은 5기를 제외하고 김노·신익성·송준길·심지원·김진상·강세황·조윤형·이주국·한용구·김학년·유○·이광문·민영환 등 13인에 의해 주로 서하여졌다. 이중 신익성(申翊聖)[1588~1644]은 이빈·허기 등 2인의 묘갈 비문을, 송준길(宋浚吉)[1606~1672]은 오윤겸·이시직·조행립·이원준 등 4인의 묘갈 비문을, 조윤형(曺允亨)은 이예견·이필중 등 2인의 묘갈 비문을 서하는 데 관여하였다.
전자는 찬자나 서자만큼 반드시 비에 새겨진 경우가 적다. 따라서 총 23기의 묘갈 중 전자가 새겨진 경우는 9기에 불과하다. 이를 살펴보면 신익성·송준길·김만기·김수항·민진원·조윤형·김재찬·김학년·유인근 등 9인이 전하는 데에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익성·송준길·조윤형 등은 해당 묘갈의 서와 전액을 동시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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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 건립 묘역(입석순: 1945년 기준)
[분묘 및 석물의 문화재 지정 현황]
1. 기념물
2007년 12월 1일 현재 시도기념물로 지정된 용인시의 분묘 유적은 제1호인 정몽주 선생 묘를 비롯하여 모두 10개소이다. 기념물로 지정된 분묘는 소재지가 현 행정구역상 처인구 6기, 기흥구 2기, 수지구 2기 등이다. 묘주의 본관은 영일정씨 1기, 청송심씨 1기, 평강채씨 1기, 여흥민씨 1기, 장수이씨 1기, 연안이씨 1기, 한산이씨 1기, 문화류씨 1기, 해주오씨 1기, 한양조씨 1기 등으로 10개 문중에 8개의 성씨가 고루 지정되어 있다.
이들 지정 분묘 묘주의 신분은 문인이 8기, 무인이 2기로서 문인이 대다수이며, 묘주는 모두 남성이다. 기념물로 지정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분묘 자체만을 지정하지만, 조광조의 묘와 이석형의 묘의 경우 분묘에 부속된 신도비를 같이 지정하기도 하였다.
묘주의 활동 시기는 고려시대가 1기, 조선 전기가 5기, 조선 후기가 4기로서,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중되어 있다. 분묘의 형태상 이종무 장군 묘[시도기념물 제25호]의 경우는 묘주의 활동 시기가 여말선초여서 봉분 하단부에 장대석을 이용하여 방형의 호석을 두르고 있는 단분합장인 방형분(方形墳)의 형태를 띠고 있다.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총 10기의 분묘 형태를 유형별로 세분하면 단분독장 4기, 단분합장 4기, 쌍분합장 1기, 쌍분삼위합장 1기 등 총 네 가지의 분묘 형태가 확인되는데,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시기의 분묘 형태는 단분합장이다. 이 단분합장 4기 중 1기는 봉분 하단부에 장대석을 이용하여 방형의 호석을 두르고 있는 방형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시도기념물로 지정된 총 10기의 분묘 중 4기에서 신도비가 확인되는데, 이중 해방 이후에 세우진 민영환 선생 묘[시도기념물 제18호]의 신도비를 검토에서 제외하면, 조선 전기에 세워진 것이 1기,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이 2기이다. 비의 양식상 방부원수(方趺圓首)가 1기, 방부개석(方趺蓋石)이 2기이다.
묘갈 중 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에 있는 오윤겸 묘갈이 유일하다. 입석 연대는 조선 후기인 1647년으로, 오윤겸의 사후 11년 만에 세워졌다. 비의 양식상 방부원수로서, 화강암제 방부의 상부에 복련을 조각하고 사면에는 당초문을 조각하였다. 비신은 청회색의 대리석을 사용하여 묘갈문은 좌서하였지만 묘주의 신분은 우서한 것이 특징이다.
묘표는 거의 모든 분묘에 세워져 있는데, 미상 3기를 제외하고 모두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 비의 양식상 방부원수가 2기, 방부규수와 방부원수의 절충 양식이 1기, 방부개석 2기로서, 세 가지 양식의 묘표가 현재 용인시 지정 기념물에 입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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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기념물 지정 분묘 유적
2. 유형문화재
경기도 지정유적 중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용인시의 금석문 유적은 2007년 12월 1일 현재 처인구 역북동에 있는 채제공(蔡濟恭)[1720~1799] 선생의 뇌문비(시도유형문화재 제76호)가 유일하다. 뇌문비(誄文碑)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비로, 조선 후기의 명신이자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의 장례일에 정조(正祖)가 공의 명복을 신에게 기원하면서 내린 제문(祭文)의 일종인 뇌문을 비에 새긴 것이다. 채제공의 묘소 역시 시도기념물 제17호로 별도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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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뇌문비
3. 문화재자료
2007년 12월 1일 현재 용인 지역에는 분묘 및 금석문 유적 3개소(처인구·기흥구·수지구에 각 1기씩)가 경기도의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묘주의 활동 시기를 보면 고려시대가 1기, 조선 전기가 2기로서 대부분 여말선초에 집중되어 있다. 분묘의 형태상 쌍분합장의 원형분과 쌍분합장의 방형분이 각 1기씩이다. 비의 형태는 신도비의 경우 모두 방부개석이며, 신도비를 갖추지 못한 최유경 묘역의 묘표는 방부원수 형태이다. 비의 입석 시기는 공안공 정옥형 신도비만이 조선 전기의 것으로, 그외는 모두 조선 후기의 것이다.
4. 향토유적
용인시 향토유적은 2007년 12월 1일 현재 제56호까지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최초 지정 이후 문화재의 해지 혹은 도지정 승격 등으로 실제 잔존하고 있는 지정 유적은 45개소이다. 이들 향토유적 중 20기가 분묘유적으로,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용인 지역에서 분묘가 차지하는 비중이 여타 다른 유적보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1945년을 기준으로 이후에 건립된 석물은 조사대상에서 제외하였다.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분묘의 소재지를 보면 현 행정구역상 처인구가 14기, 기흥구가 4기, 수지구가 2기 등이다. 묘주의 본관이 불분명한 1기를 제외하면 해주오씨 3기, 덕수이씨 2기, 전의이씨 1기, 연안이씨 1기, 전주이씨 1기, 용인이씨 1기, 청주이씨 1기, 우봉이씨 1기, 의령남씨 1기, 함안조씨 1기, 풍양조씨 1기, 나주정씨 1기, 여양진씨 1기, 남양홍씨 2기, 창원황씨 1기 등으로 15개 문중에 고루 지정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묘주의 신분은 문인이 13기, 무인이 5기이며, 부부인이 2기이다.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분묘의 경우, 분묘 자체만을 유적으로 지정한 경우도 있으나, 분묘에 부속된 대낭장비나 신도비, 또는 정려각을 같이 지정하기도 하였다. 기흥구 중동에 있는 향토유적 제48호인 남양홍씨 시정공파무관 묘역의 경우 남양홍씨 시정공파가 대대로 무관을 역임한 만큼 묘역 일원 전체가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외에 향토유적 제3호와 제4호, 제46호·제47호의 경우 해당 묘역의 분묘 외에 대낭장비와 신도비 등이 같이 지정되어 있다. 또한 수지구 고기동에 있는 이완 묘의 경우 분묘와 정려각이 동시에 향토유적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주의 활동 시기는 고려시대가 1기, 조선 전기가 8기, 조선 후기가 11기로서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중되어 있다. 분묘 조성 시기와 묘역의 형태를 살펴볼 때 첫째, 고려의 신종~희종 대에 활동한 진화 묘(향토유적 제31호)의 경우 비록 고려시대에 활동한 인물이나 묘가 실전된 지 5백여년 만에 묘지석을 발견하여 다시 봉분을 조성함에 따라 분묘의 형태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분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둘째, 이애·경신공주 묘(향토유적 제32호)와 황림 묘(향토유적 제40호)의 경우는 묘주의 활동 시기가 조선 전기임에 따라 봉분하단부에 장대석을 이용하여 방형의 호석을 두르고 있는 방형분의 형태이다.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총 20기의 분묘 형태를 각 유형별로 세분하면 원형분 형태의 단분 2기, 단분독장 5기, 단분합장 8기, 단분3위합장 1기, 쌍분 1기, 쌍분합장이 3기인데, 이중 2기는 쌍분합장(방형분)의 형태이다. 따라서 총 일곱 가지의 분묘 형태가 확인되는데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시기의 분묘 형태는 쌍분합장(방형분)의 형태이다.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분묘 중 오달제(吳達濟) 선생 묘[향토유적 제3호]의 대낭장비(帶囊藏碑)의 경우, 묘주인 오달제가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 청나라로 끌려가 죽음을 당한 후 시신이 돌아오지 못하자, 후손이 오달제의 유품인 허리띠와 비단주머니를 대신 장사지내어 ‘대낭장비’라 이름한 유일한 예이다.
용인시 지정 향토유적 총 20기의 분묘 중 3기에서 신도비가 확인되는데, 이중 부자간인 정윤복(丁胤福)·정호선(丁好善) 묘(향토유적 제47호)의 경우 사후 각각의 분묘에 신도비를 세운 경우이다. 신도비는 모두 조선 후기에 세워졌는데, 비의 양식상 방부개석이 3기, 방부이수가 1기이다.
묘표는 거의 모든 분묘에 세워져 있다. 입석 연대는 조선 전기가 2기이고 나머지는 조선 후기의 것이다. 비의 양식상 방부이수가 1기, 방부개석과 방부규수의 절충양식이 1기, 방부개석 7기, 방부원수 5기로서, 네 가지 양식의 묘표가 조선 전 시기를 통해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에 있는 조중회 묘(향토유적 제7호)의 묘표의 경우 비문의 앞면은 한호(韓濩)[1543~1605]의 글씨를, 뒷면은 중국 당나라의 명필인 안진경(顔眞卿)[709~785]의 글씨를 집자한 집자비(集字碑)이다. 집자비란 비문을 찬술한 뒤에 선대 명필의 유묵 중에서 해당 글자를 골라 짜집기하여 이를 비신에 새긴 석비를 말한다.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에 있는 이혜(李嵇)·이희유(李喜濡) 묘 등에서 한호와 안진경의 집자비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집자비는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한·중 역대 명필과 서예에 대한 깊은 연구의 결과물로 등장한 특수한 형태의 입석 방법으로 진경시대(眞景時代)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특히 정조대[1777~1800]에 많이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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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향토 지정 유적 분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