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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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原梁氏 |
영어음역 | Nanyang Wonssi |
영어의미역 | Namwon Yang Clan |
이칭/별칭 | 해당사항 없음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운학동 |
집필자 | 이인영 |
세거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대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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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운학동 |
입향시기/연도 | 14세기 |
성씨시조 | 양우량(梁友諒) |
입향시조 | 양구주(梁九疇) |
[정의]
양우량을 시조로 하고 양구주를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용인시 세거 성씨.
[연원]
남원양씨의 원래 시조는 본래 탐라국 개국 신화의 삼신인 중의 한 사람인 양을나(梁乙那)이다. 757년(경덕왕 16) 양우량이 왕실에 큰 공을 세워 남원부 남원백에 봉을 받아 남원을 관적으로 하여 시조가 됨으로써 양씨는 제주와 남원 두 관적으로 나뉘었고 후에 충주가 분관되어 세 관적이 있게 되었다. 일제 때 조사된 성씨 조사에서 양씨 관적이 79본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모두 이 세 관적에서 나온 것이다.
[입향경위]
고려 우왕 때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으로서 숭정대부로 남원군에 증직된 양구주가 입향조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정효편을 보면, “양구주의 아들 양성지(梁誠之)가 정승이 되었는데 부친은 양지에 장사하고 모친은 강원도 횡성 소흘산에 장례하였다. 매양 녹으로 부양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기더니 아들 양원(梁瑗)으로 하여금 양지현감이 되게 하고, 차남 양수(梁琇)는 횡성현감을 삼아서 각각 부모의 묘소에 제사를 받들게 하니 영화와 효도에 유감이 없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1957년에 간행된 『경기도지』에는 용인에 세거하고 있는 남원양씨의 집성촌은 용인면 운학리로써 26호가 살고 있으며 250여 년 전부터 세거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14세기 경부터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현황]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운학동이 남원양씨들의 집성촌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외지로 나가게 되어 지금은 종가와 종손들 몇 가구만 남아 있다.
[관련유적]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대대리 속칭 양달말에는 남원양씨의 입향조 양구주의 묘가 있다. 최근 강원도 횡성에 있던 부인의 유골을 합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