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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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廷珏 |
영어음역 | Nam Jeonggak |
이칭/별칭 | 오산,남영득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도형 |
[정의]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호는 오산(午山), 이명(異名)은 남영득(南英得, 南寧得)이다.
[활동사항]
남정각은 1913년 3월까지 한학을 수학하고 서울기독교청년회 공업과에 입학하였다가 그 이듬해에 중퇴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는 한편 수원·안성·용인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신문』을 비밀리에 배부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만세 운동에 나설 것을 귄유하였다.
1920년 3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중국청년회(中國靑年會) 어학과(語學科)에서 수학하다가 중퇴하였다. 창춘[長春]·텐진[天津]·상하이[上海] 등지를 순회하며 독립지사들을 찾아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던 중 1921년 겨울 베이징에서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과 만나고, 1922년 6월 최용덕(崔用德)·이종암(李鍾岩)의 소개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의열단원으로 국내에 폭탄을 반입하여 일제의 통치 기관을 폭파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자금이 부족하여 폭탄을 반입할 수가 없었다. 이에 남정각은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서울 황금정(黃金町) 2정목 정목여관(正木旅館)에서 동지 권동산(權東山)[일명 正弼]·유병하(柳秉夏)·유시태(柳時泰) 등과 의논하고 그들에게 권총을 주며 내자동(內資洞) 이인희(李麟熙)에게 자금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그는 상하이에서 온 임시정부 군무총장 ‘정(丁)모’라 가칭하고 유시태와 함께 이인희의 집에 가서 5,000원을 요구하였다가 그의 고발로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 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의 구형을 받고 6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8년 출옥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