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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833
한자 李洸
영어음역 Lee Gwang
이칭/별칭 사무,우계산인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장필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41년(중종 36)연표보기
몰년 1607년(선조 40)연표보기
본관 덕수
대표관직 호조참판|지중추부사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용인 전투에 참여한 문신.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사무(士武), 호는 우계산인(雨溪散人). 증조부는 사간원사간 이의무(李宜茂), 할아버지는 좌의정 이행(李荇), 아버지는 도사 이원상(李元祥), 어머니는 동부승지(同副承旨) 신옥형(申玉衡)의 딸이다.

[활동사항]

1567년(명종 22) 생원이 되고, 1574년(선조 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권지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을 거쳐 1577년(선조 10) 예문관검열이 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그 뒤 평안병마평사·성균관전적·병조좌랑·정언·형조좌랑 등을 거쳐 1582년(선조 15) 예조정랑·지평, 1583년(선조 16) 성균관직강·북청판관·함경도도사를 지냈다.

1584년(선조 17) 병조정랑·장악원첨정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가 북도민의 구호 현황을 살피고 돌아와 영흥부사가 되었다. 1586년(선조 19) 길주목사로 나갔다가 함경도관찰사겸순찰사로 승진했고 1589년(선조 22)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동년 겨울 모역한 정여립(鄭汝立)의 문생과 그 도당을 전부 잡아들이라는 영을 어기고, 혐의가 적은 인물을 임의로 용서해 풀어 주었다가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591년(선조 24) 호조참판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곧 지중추부사로서 전라도관찰사를 겸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감사로서 경상도관찰사 김수(金晬),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이 이끄는 관군과 합류하여 북상해 서울을 수복할 계획을 세웠다. 6월 용인에 주둔한 왜적을 공격하려 할 때, 권율(權慄)은 좀 더 신중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지체하고 있다는 비방을 듣고 있던 이광은 선봉장 이지시(李之詩)백광언(白光彦) 등에게 공격을 명하였다가 왜적에게 대패하였다.

전라도로 돌아가 권율과 함께 전주 지역에 침입한 왜적을 웅치(熊峙)에서 무찔렀다. 8월 용인에서의 패전으로 인하여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아 순천(順天)에서 종군하고 있었는데, 9월 대간에서 국문할 것을 청하여 의금부로 잡혀왔다가 윤두수(尹斗壽)의 적극적인 변호로 사형은 면하고 대신 벽동군(碧潼郡)에 유배되었다. 그 뒤 유배에서 풀려나 1594년(선조 27) 고향으로 돌아갔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우계집(雨溪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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