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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746
한자 宋時烈
영어음역 Song Siyeol
이칭/별칭 성뢰,영보,우암,우재,송자,문정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필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충렬서원 원장
출신지 충청북도 옥천군
성별
생년 1607년연표보기
몰년 1689년연표보기
본관 은진
대표관직 우의정|좌의정

[정의]

조선 후기 충렬서원의 원장을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은진.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또는 우재(尤齋). 증조부는 봉사(奉事) 송구수(宋龜壽), 조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곽씨로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와 혼인하였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활동사항]

27세 때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1649년 효종 즉위 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지냈다. 이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에서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金自點) 등이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8년 7월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연간에는 1668년(현종 9) 우의정,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를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파직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구(長垢)·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9년 1월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충렬서원 선생안』에 1680년부터 1689년까지 충렬서원의 원장으로 재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용인의 포은 정몽주 종가에 ‘포은선생영당’과 ‘영모재(永慕齋)’라 쓴 송시열의 육필 현판이 전한다.

[학문과 사상]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웠고, 1625년(인조 3) 무렵부터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으며,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연구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經禮疑義)』·『심경석의(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朱文抄選)』·『계녀서(戒女書)』·『우암집(尤庵集)』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 해에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송시열을 배향하는 서원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고, 그 중 사액서원이 37개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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