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6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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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元立 |
영어음역 | Kim Wonrip |
이칭/별칭 | 사탁,갈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영의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탁(士卓), 호는 갈천(葛川). 계림군 김균(金稛)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찰방 김성진(金聲振)이다. 처는 정응규(鄭應奎)의 딸이다.
[활동사항]
1613년(광해군 5) 성균관에 있을 때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모하자 몇몇 유생들과 함께 이를 비판하는 복합상소를 올려 광해군의 미움을 받아 하옥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1627년 전주정시(全州庭試)에 병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가주서(假注書)로서, 종묘에 제사 지낼 때 임금을 수행한 공으로 일자(一資)를 올려 받았다. 1630년 지평이 되었고, 1635년 반숙마(半熟馬) 한 필을 하사받고 헌납이 되었다.
그 뒤 장령·성균관사예·직강·예조좌랑·예조정랑·호조정랑·통례원우통례 등을 두루 거쳤으며, 외직으로 해운판관·부안현감·능주목사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전주로 가서 형 김원중(金元中)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상경하여 과천 부근에서 진(陣)을 치자, 인조가 이 사실을 알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1647년 함경도 종성부사로 있을 때 인근의 백성들이 몰래 청나라 땅에 사냥하러 들어갔다가 청군에게 붙잡힌 사건이 일어나 종성부사직을 물러났다. 이후 실의에 차 용인에 낙향하여 제자를 기르며 노후를 보냈다. 그가 낙향했던 지금의 신갈 땅이 그의 아호 ‘갈천’을 따 갈래라 불리게 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예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