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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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음역 | Yeoksa |
영어의미역 | History |
분야 | 역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기도 용인시의 역사.
[개설]
용인이라는 지명은 삼국시대 이래의 변화를 거쳐 1413년(태종 13)에 등장했다. 오늘날 용인시의 영역이 형성된 것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기존의 용인군과 양지군, 죽산군의 일부가 통합됨으로써 그 모태가 마련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과정은 지역 내외의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변화를 거듭해 오는 가운데 형성된 것이다.
[선사시대]
1. 구석기시대
경기도 용인시에서 처음으로 구석기시대의 석기가 찾아져 보고된 것은 1996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진 용인시 매장문화재 지표조사에서이다. 석기가 채집된 곳은 모두 6개 지점으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 파담마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목신리 신촌마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 구수동,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덕성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봉무리 도장골 등이다.
경기도 용인시에서 처음으로 구석기 유적이 발굴된 것은 1998년 전원주택 개발 지역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유적이다. 평창리 유적은 경기도 지역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구석기 유적 가운데 하나로 주로 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경기도 지역의 구석기시대 문화 양상과 구별되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2. 신석기시대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보고된 신석기 유적은 상갈 유적으로 움집 등 주거지의 유구가 발견되지 않은 단순 유물산포지이다. 신석기시대 단일 층위를 보이고 있고 출토 유물도 다량의 빗살무늬토기편과 간돌도끼 1점, 용도 미상의 토기제품 3점 등 신석기시대 유물만이 출토되었다. 유적의 편년은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B.C 3500~2500)로 추정된다.
3. 청동기시대
1) 집터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집터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봉명리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대덕골 유적이 있다. 집터가 위치한 곳의 지세는 모두 구릉지대의 꼭대기이며 긴 방향은 등고선과 나란한 모습이다.
2) 고인돌
경기도 용인 지역에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왕산리 유적을 비롯하여 12곳에서 18기의 고인돌이 조사 보고 되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근삼리 유적,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 고인돌 유적,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초부리 유적,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외사면 근삼리 유적,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유운리 유적,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유적 등 15기가 남아있다.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는 탁자식과 개석식 고인돌이 함께 나타나고 있으며 재질은 거의 대부분 화강암이나 편마암 계통으로 부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암질을 선택하여 고인돌을 축조하였던 것 같다.
3) 선돌
경기도 용인 지역에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유운리(신원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사암리·두창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창리 등 4곳에서 모두 7기의 선돌이 발견되었다. 경기도의 다른 지역보다 선돌이 많이 발견된 편이며 선돌의 건립 목적은 민간신앙의 대상물인 숭배 기능과 농경에 대한 풍요 그리고 경계의 기능이 섞여 있는 것 같다.
4) 유물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이 찾아지는 곳은 거의 대부분 낮은 구릉이나 계곡 지대이며 주변에 고인돌과 집터 등 관련 유적이 있다.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로는 민무늬토기를 비롯하여 구멍무늬토기, 팽이형토기, 굽잔토기, 덧띠토기, 붉은간토기, 검은간토기 등 비교적 다양하다.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발견된 석기로는 간돌검, 반달돌칼, 화살촉, 돌도끼, 숫돌, 가락바퀴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초부리에서 한국식 동검을 만든 거푸집이 발견되었다.
[삼국시대]
삼국시대 경기도 용인 지역에 관한 문헌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당시 역사의 실상을 밝히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삼국시대 경기도 용인 지역은 백제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쇠퇴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마한 군장사회들 중 하나였던 백제국(伯濟國)이 백제(百濟)로 흥기하게 됨에 따라 그 중심지로부터 불과 30여㎞ 떨어져 있던 경기도 용인 지역은 백제 세력권 안으로 흡수·통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용인 지방은 멸오(滅烏)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375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3만 병력을 동원해 백제의 왕도 한성(漢城)을 강습하여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 한강 유역 일대는 물론 조령·죽령에서 남양만까지 확대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경기도 이천 지역에는 남천현, 용인 지역에는 구성현(驅城縣)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설치했다는 구성현은 군현제 하의 행정 단위가 아니라 용인 지역에 고구려의 군사적 거점을 설치했다고 볼 수 있다.
550년 백제의 고구려 도살성 공격 및 고구려의 백제 금현성 공격으로 두 나라의 군세가 소진한 틈을 타 이 두 성을 차지했다. 그리고 551년 신라는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 세력을 몰아내고 한강 유역은 다시 백제가 차지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돌궐과의 군사적 긴장 고조로 나제동맹군(羅濟同盟軍)의 움직임에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다.
552년 신라는 한성(漢城)을 장악한 후 553년 백제의 동북 변경 지역을 강점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결국 554년 신라와 백제 사이의 관산성 전투로 나제동맹은 와해되고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신라는 경기도 광주(廣州) 일대에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阿湌) 김무력(金武力)을 군주로 삼아 새로운 점령지의 군정권(軍政權)을 통할하게 하였다. 용인 지역 역시 이러한 신주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용인 지역은 685년(신문왕 9)에 한산주(漢山州)로 편제되었다. 통일신라의 서북단에 위치한 한산주는 그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당나라 뿐 만 아니라 북방의 발해와 말갈 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시되었다.
지방 군사 조직인 10정은 각 주마다 하나씩 설치되었지만 한산주에는 2개의 정이 배치되었다. 황무현(지금의 경기도 이천시)에는 남천정이, 황효현(지금의 경기도 여주시)에는 골내근정이 각각 배치되었다. 경기도 용인 지역은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아마도 남천정의 휘하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다시 758년(경덕왕 16)에 한산주가 한주로 개칭되고 한주에 속한 중원소경과 28군 49현 중 거서현(巨黍縣)에 편제된다. 이 거서현이 고구려의 구성현 또는 멸오(滅烏)로서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성(駒城) 일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언어학적으로는 구성과 거서가 같은 의미로 용차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구성(駒城)은 큰 성(大城)을 의미한다.
통일신라는 이후 약 150여 년간 용인 지역에서 영유되는데, 지방 호족 세력의 발호와 귀족 계급의 부패 등으로 인해 극심한 사회 혼란기를 겪게 된다. 822년(헌덕왕 14)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과 825년(헌덕왕 17)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의 난’ 등을 거치면서 통일신라 사회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887년(정강왕 2) 한주의 이찬 김요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한주 지역은 다시 반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로부터 2년 뒤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나고 이후 경기도 용인 지역은 신라의 영토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배자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통일신라 말에 이르러 세 나라로 분리되는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된다.
889년(진성왕 3)에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과 조세가 부족하여 나라의 창고가 텅 비게 되었고 왕은 사자를 보내 조세를 독촉하자 각지에서 도적들이 일어났다. 사벌주(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원종과 애노가 제일 먼저 일어났고, 여기에 자극을 받아 북원(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의 양길, 양길의 부하가 된 궁예, 죽주(지금의 경기도 안성시)의 기훤, 완산(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의 견훤 등이 대표적이다.
궁예가 899년에 왕건을 보내 광주·충주·당성(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청주(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괴양(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을 공격하여 평정하였을 때 이 지역도 함께 복속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고려 건국 이후 경기도 용인 지역은 용구현(龍駒縣)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현종 9)에 고려의 지방제도가 다시 개편되어 4도호(都護)·8목(牧)·56지주군사(知州郡事)·28진장(鎭將)·20현령(縣令)이 설치되었는데 이때 용구현은 광주목(廣州牧)의 임내로 편입되었다.
1172년(명종 2)에 광주목에서 분리되어 감무(監務)가 파견되고 후에 승격하여 현령관(縣令官)이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용구현과 함께 수원부에 소속된 처인부곡이 있었다. 처인부곡 지역은 1232년(고종 19) 몽고의 제2차 침입 때 처인성 전투에서 승장 김윤후(金允侯)가 적장 살리타[撒禮塔]를 사살하여 적 3만 대군을 크게 물리쳤다. 처인부곡은 그 후 부곡에서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어 처인현(處仁縣)이 되었다.
고려시대 문화 유적으로는 10세기를 전후하여 수축된 고려백자 요지(窯址)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서리 중덕마을에 있다. 또한 고려 중기의 승려 현오국사의 탑비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서봉사에 있으며, 이곳에는 고려 인쇄 문화를 보여주는 서봉사장판(瑞峰寺藏板)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
처인현(處仁縣)은 본래 수원에 소속된 부곡이었으나, 1413년(태종 17) 처인현과 용구현과 합하여 용인현(龍仁縣)이라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선 초기 호수는 457호, 인구는 1,168명이었다. 1400년(정종 2)에 용인향교가 건립되고, 1576년(선조 9) 이계(李契)·이지(李贄) 등이 충렬사(忠烈祠)를 건립하고 정몽주(鄭夢周)를 배향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라순찰사 이광(李洸)이 이끄는 근왕병 3만이 광교산에서 패했으나, 의병장 김충수(金忠守)의 청룡산(靑龍山)싸움과 원연(元埏)의 햇골싸움으로 적세를 크게 꺾었다.
병자호란 때 충청감사 정세규(鄭世䂓)는 용인의 험천(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서 패했는데, 이 싸움에서 공주영장 최진립(崔震立)이 순사하였고, 용인 사람 이찬조(李讚祖) 등이 순절하였다. 이듬해인 1637년 1월에는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이 광교산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1650년(효종 1)에 심곡서원(深谷書院)이 건립되고 기묘명현 조광조(趙光祖)의 신위가 배향되었다.
1895년 지방 관제를 개편함에 따라 용인현이 용인군(龍仁郡)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양지, 죽산 등과 함께 충주부에 편제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3도제로 환원되면서 경기도의 4등군(等郡)이 되었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고 김하락 일행이 의병 모집에 나서자 용인 지역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경기도 연합의병진인 이천수창의소 결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일제강점기]
1914년 3월 행정 구역 개편으로 전국의 부·군·면을 통폐합하여 12부·220군·2,518면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경기도 용인군도 양지군 전역과 죽산군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수여면·포곡면·모현면·읍삼면·수지면·기흥면·남사면·이동면·고삼면·내사면·원삼면·외사면 등 12면으로 구성되었고 소학동에 소재했던 용인군청도 수여면 김량장리로 옮겨졌다. 이후 1937년 읍삼면이 구성면(駒城面)으로, 수여면이 용인면(龍仁面)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행정 구역 개편 시의 면·리의 명칭은 해방 이후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1870년대 경기도 용인군의 인구는 22,659명(남 11,239, 여 11,420)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양지군 전체와 죽산군의 일부가 편입되면서 상당수 증가하였다. 1915년 현재 용인군 인구는 조선인 13,734호 71,350명(남 36,684, 여 34,666), 일본인 123호 346명(남 210, 여 136), 중국인 6호 11명(남 11) 등 총 13,863호 71,707명(남 36,905, 여 34,802)이 거주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
1963년 생활권이 떨어져있던 고삼면이 이웃 안성군으로 편입되었으며, 1973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구성면 죽전리가 수지면에, 원삼면 가좌리가 외사면에 각각 편입되었다. 1979년 용인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3년에는 수지면 하리·이의리가 수원시로, 남면 진목리·봉명리 일부가 평택군 진위면으로, 외사면 가좌리 일부가 원삼면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1985년 기흥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96년 용인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외사면을 백암면으로, 내사면이 양지면으로 개칭되었고, 수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중앙동·역삼동·유림동·동부동이 신설되는 등 행정상 많은 변화를 거쳤다. 2000년 9월 1일 구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1년 12월 24일에는 수지읍이 수지출장소로 승격되었고, 이 때 풍덕천 1·2동, 죽전 1·2동, 동천동, 상현동의 6개 동이 신설되었다.
이로써 경기도 용인시는 1개 출장소, 2개 읍, 7개 면, 107개 법정리·동이 되었다. 2003년에는 상현동이 분동되어 성북동이 신설되었다. 2005년 10월 31일 수지출장소가 수지구로, 기흥읍과 구성읍이 기흥구로, 경기도 용인시 동부 지역이 처인구로 각각 승격되어 3구, 1읍, 6면, 23동, 958통·리, 6,215반으로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