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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강봉문은 중병이 든 아버지를 낫게 해달라며 단을 쌓고 정성껏 하늘에 기원하였다. 그러나 끝내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죽과 나물만 먹고, 세수도 하지 않고 머리도 빗지 않았다. 강봉문의 효행에 감동한 호랑이가 밤이 되면 강봉문을 지켜주었다고 하며, 곡하던 자리에서는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강봉문의 효행이 알려져 동몽교관(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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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봉두리에 있는 장흥위씨 재실. 위대경은 임진왜란 때 종제 수사공과 더불어 적진, 옥포, 웅치, 상주 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상주영장에 제수되었다. 상주영장으로 재직 중이던 위대경이 전사하자 부인 전주최씨는 아들 위효징(魏孝徵)을 데리고 난리를 피해 율촌면 봉두리로 옮겨왔다. 이후 위효징이 성장하여 김명운의 딸과 혼인하면서 장흥위씨 가문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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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동도리 유촌에 있는 조선 후기 유학자 김류를 모신 사당. 귤은당은 1904년 귤은 김류(金瀏)[1814~1884]의 학식과 덕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제자인 박규석(朴圭錫)[1885~1923] 등이 건립하였다. 김류는 성리학의 대가인 기정진(奇正鎭)[1798~1879]을 사사하여 40여 년간 의심나는 부분을 질의하고 그것을 일일이 기록하였다. 귤은당은 부지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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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의인이며 효자. 김경식은 1914년 8월 14일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 1643번지[죽포1길 21-13]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김영환이고, 어머니는 김순언심이다. 독립유공자인 김인식의 동생이다. 1923년 개교한 사립 죽포보통학교[현 봉덕초등학교]에 제 1회 학생으로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김경식은 가사를 도우며 지역 주민들에게 한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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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열녀. 의령남씨(宜寧南氏)는 고기잡이와 나무하는 것을 업으로 하던 김대선(金大善)의 처이다. 시집간 지 4개월도 지나지 않아 남편과 함께 고기잡이를 나갔는데 태풍을 만나 배가 뒤집어졌다. 배에 탔던 사람들 가운데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들은 간신히 헤엄쳐 나왔다. 의령남씨도 떠있는 나무에 의지하여 겨우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 때 남편이 파도 속으로 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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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김문현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80세의 노모를 정성껏 모셨다. 노모가 노환으로 사경을 헤매자, 김문현이 하늘에 정성껏 기도하고 간호하니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노모가 쾌차하였다. 두 해에 걸쳐 흉년이 들자 김문현은 가난한 이웃들이 무사히 흉년을 넘길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 김문현의 효행과 덕행이 알려져 후일 전남유림모성곡회(全南儒林募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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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서도리 출신의 효자. 김양록(金陽祿)은 본관이 김해(金海)이고 학성군(鶴城君) 김완(金完)의 후손이다. 여수시 삼산면의 거문도 서도에서 김진귀(金鎭龜)와 문화차씨(文化車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0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은 김양록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렀고, 이후 평생토록 아침저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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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열녀. 김영아는 7세 때 아버지 김두화(金斗化)를 여의고 10세 때 어머니마저 집을 떠나자 남동생과 함께 삼촌댁에 의지하였다. 16세에 돌산읍 신복리 신기마을에 사는 신안주씨(新安朱氏) 주봉신(朱鳳信)과 혼인하였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아들을 얻었으나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17세의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김영아에게 재혼을 권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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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본관은 김녕(金寧). 충의공 김문기(金文起)의 23세 후손이고, 김재광(金再光)의 아들이다. 김용기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여 어버이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였다. 동구 밖 바닷가에 나가 어머니가 좋아하는 고기를 잡아드렸고, 때때로 산채나물을 마련하고자 해가 지도록 산을 헤매기도 하였다. 소년시절에 아버지를 잃은 그는 좋은 일이나 궂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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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이자 농촌 지도자. 김유석은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백야리 출신이다. 네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김유석의 어머니는 개가(改嫁)를 하지 않고 밤이면 베를 짜고 낮이면 품팔이나 해초를 뜯어 살림을 꾸려 나갔다. 김유석은 어머니가 몸이 불편하여 음식을 들지 아니하면 며칠이고 같이 굶었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김유석은 춘궁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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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김일출(金日出)은 본관이 김해(金海)이고 아버지와 함께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았다. 하루는 배가 태풍을 만나 돛대와 키가 모두 부러지고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해졌다. 이때 김일출이 아버지를 안고 하늘을 향해 기도하자 바람과 파도가 갑자기 멈추고 배가 무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가 눈병이 나 보이지 않게 되자, 매일 식사 때마다 맛있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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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김정각(金廷珏)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다. 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함께 3년 동안 시묘(侍墓)를 하였다. 이후 이장을 위한 묘 자리를 잡기위해 밤늦도록 산에서 기도하고 돌아오다가 어두워서 길을 잃게 되었다. 그 때 사슴이 나타나 그 뒤를 따라가 보니 어느 곳에 이르러 사슴이 발로 땅을 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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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김지옥(金祉玉)은 본관이 김해(金海)이고 양무공(襄武公) 김완(金完)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 대한 효행이 극진하여 김지옥의 어머니가 자신에 대한 효행보다는 친척들과 이웃에게 좀 더 신경을 쓸 것을 당부할 정도였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했을 때 여러 날을 엎드려 곡을 하자 어머니의 병환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김지옥은 자신은 검약하고 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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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김해김씨 김지혁·김장혁 형제는 아버지가 병이 들자 드리는 약을 맛보았고, 변까지 맛보았다. 상을 당하여 3년 간 몸소 묘 앞에서 나무를 하고 밥을 지어 먹으니 풀이 나지 않았다. 성묘할 때마다 도깨비불이 앞에서 인도하고 나루에 가면 바람이 그쳤다. 어머니 상에 있어서도 또한 그렇게 했다. 형제가 함께 50년을 한 이불을 덮고 살며 효우(孝友)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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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열녀. 문화차씨(文化車氏)는 시집간 지 3년 만에 남편 김진귀(金鎭龜)가 요절하였다. 이에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시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마음을 바꾸고 아들을 키우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아들이 장성하여 혼례를 치르고 손자를 얻자 문화차씨는 자신의 할 일은 다했다고 말하고 음식을 끊어 남편의 기일에 스스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후에 문화차씨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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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김찬기(金燦基)는 본관이 김해로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이다. 아버지가 병이 난 지 3년 만에 돌아가시려고 하자 김찬기는 자신의 넓적다리의 살을 잘라서 끓여 주었다. 아버지는 의식을 회복하고 어느 정도 차도를 보였지만 얼마 후 결국 별세하였다. 김찬기는 크게 슬퍼하며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고, 이후 평생토록 매일같이 아버지의 묘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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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국립 교육기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과거에는 나라에서 토지, 노비, 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현대에는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시대 돌산은 순천부 행정구역에 속하여 방답진(防踏鎭)이 위치하고 있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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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박중엽(朴重葉)은 60세가 넘은 아버지가 여러 달 병석에 누웠다가 끝내 숨을 거두자 급히 단지수혈하여 아버지를 소생시켰다. 또 왼쪽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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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열녀. 영광신씨(靈光申氏)는 박찬종(朴贊宗)의 처로 시집간 지 3년 만에 남편이 죽었다. 당시 영광신씨는 겨우 20세의 나이로 자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고, 상복을 입는 기간 동안 몸가짐을 엄숙히 하였다. 시아버지가 연로하여 항상 침상에 있었으나 언제나 시아버지의 침상을 따뜻하고 깨끗하게 유지하였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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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여천동 내동마을 사충사 터에 세워진 비. 사충사(四忠祠)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종군하다가 전사한 정철(丁哲), 정린(丁麟), 정춘(丁春), 정대수(丁大水)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847년(헌종 13)에 건립되었다. 이후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거되었다가 1921년 여수 웅천동에 오충사(五忠祠)란 이름으로 복원되었다. 이에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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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사당. 일제강점기인 1926년 순종의 장례식 때 여수 지역 유림 대표 정충섭, 정영민, 최석주, 최봉삼 등 네 명이 중심이 되어 유림 50여 명을 규합하여 여수 유림 조선통곡단을 결단한다. 그들은 열차편으로 상경하려 했으나 일제 관헌에 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은밀히 야간에 선박을 이용하여 부산을 거쳐 순종의 장례식에 참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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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삼황묘를 증축하면서 세운 비. 삼황묘는 여수 유림들이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고종 태황제(高宗太皇帝), 순종 효황제(純宗孝皇帝)의 유덕을 숭모하고, 민족 정신을 고양하기 위하여 1927년에 세운 사우(祠宇)이다. 삼황묘비에는 삼황묘를 세우면서 모금한 내력이 적혀 있다. 비는 여수 충민사 입구 삼황묘 앞에 있다. 삼황묘비는 전체 높이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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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서도리에 있는 사당. 서산사는 살아 있을 때 높은 학문으로 후학을 양성하고, 효행이 지극했던 만회 김양록을 중심으로, 그의 아들 김지옥, 인동부사 김정태, 거문도사립낙영학교를 세운 김상순 등의 공덕을 기리고자 세운 사당이다. 사당의 형태는 1900년에 세워졌다는 사우를 근거로 하였고, 1985년 11월 30일, 당시 여천군청과 삼산면 향토문화추진위원회,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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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선처흠(宣處欽)의 본관은 보성(寶城)이고 문충공(文忠公) 선윤지(宣允祉)의 후손이다. 선처흠의 아버지가 눈병이 있어 약을 써도 오랫동안 효험이 없었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흰 매의 눈알을 구해 먹으면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선처흠이 산에 올라 치성으로 기도하자 한 쌍의 흰 매가 날아와서 잡아 약으로 썼더니 아버지의 병환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선처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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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열녀. 경주김씨(慶州金氏)는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은 선처흠(宣處欽)의 처로 남편이 고질병으로 고생하자 넓적다리 살을 잘라 먹여 낫게 하였다. 선처흠의 임종 시에는 손가락을 베어서 나온 피를 먹여 며칠을 더 연명케 하였다고 한다. 경주김씨의 열행이 조정에 알려져 명정(命旌)이 내려졌고, 이에 정려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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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가장리 평촌에 있는 문화유씨 사우. 문화유씨 유용공(柳用恭)[1492~1511]과 유몽정(柳夢井)[1551~1589], 유렴(柳濂)을 배향하고 있다. 이전에는 유공신(柳公信)도 배향하였으나 중건하면서 빠졌다. 유용공은 호가 모강(茅崗)이며 세종 시기에 활동한 명신으로서 청백리였던 유관(柳寬)의 후손이다. 유용공은 한양에서 태어났으나, 나부 모산촌(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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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에 있는 조선 중기 장군 이대원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 1637년(인조 15)에 세워졌다거나 1590년(선조 23), 또는 1597년(선조 30)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모두 전거(典據)가 불확실하다. 이대원 장군이 순직한 해(1587)에 「손죽도 이대원 장군께 드리는 글(弔詞)」을 쓴 한천 정협(鄭恊)의 문장을 통해 당시 사당이 세워졌음을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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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조선 중기 사우. 여수 충민사는 충무공 이순신,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을 모신 사당이다. 여수 지역 유림과 주민들이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춘기 석채례와 음력 9월 10일에 추기 석채례를 지낸다. 4월 28일에는 충무공 탄신제를 거행하고 있다. 여수 충민사는 덕충동 마래산 남쪽 방향의 산기슭에 있다. 1598년(선조 31) 충무공 이순신이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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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말기의 국립 중등 교육 기관. 여수 지역은 순천부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향교의 역사가 짧았으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뒤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897년 여수군(고종 34)이 생기면서 여수향교가 세워졌다. 여수향교는 1897년에 옛 좌수영 지역에 여수군이 설치되면서 창건되었다. 대성전에는 공자가 으뜸으로 모셔져 있으며, 안자(顔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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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전통시대에 살았던 효부나 열부. 우리의 전통 사회에서 여성의 효열(孝烈)은 남성들의 충효(忠孝)와 함께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의 이념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실천적 행동은 민중의 귀감이 되었으며 가문의 영예이기도 했다. 여수에도 효녀와 효부 그리고 열부로서 『삼강록(三綱錄)』 등 기록에 남아 있거나 효열비를 세워 그 행실을 기리는 대상 인물은 대단히 많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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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웅천동에 있는 조선 후기 이순신과 압해정씨 창원맥의 4충신을 모신 사당. 사충사는 원래 가곡사(佳谷祠)라 하였다. 가곡사는 1847년(헌종 13)에 정재선(丁載璿)이 유림의 지원을 받아 정철(丁哲)에게 충절공(忠節公)이란 시호가 내려진 것을 기리기 위해 가곡마을에 세웠다. 통훈대부 행 종부사주부 정창협(丁昌夾)[1798~1875]이 상량문과 예성축문을 지어 21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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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념 체계. 유교의 교리는 공자의 인의(仁義) 정신으로 윤리 도덕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대도(大道)를 실천하고 보급하여 도의사회(道義社會)를 건설하자는 유학 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유교는 현실성을 중시하고 현실 문제를 개혁하려는 데 중점을 둔 교학 사상으로 내세나 이면 세계, 사후 세계는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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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채경(采京), 호는 덕춘(德春). 양도공 이천우(李天佑)의 후예로, 가선 이응련(李應鍊)의 아들이다. 이현두는 천성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했다. 부친이 병을 얻어 다만 노루고기와 잉어회 먹기를 원하므로, 추운 겨울임에도 부친의 소원을 풀어드리고자 처 김씨와 더불어 낮에는 산, 밤에는 물가에서 기도하여 정성을 다해 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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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장필규(張弼逵)는 본관이 인동(仁同)으로 할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장필규의 아버지 장사함(張思咸)과 함께 밤낮으로 빈소를 지켰다. 장사함이 곡을 하면 장필규(張弼逵)도 곡을 하였으며 장사함이 곡을 그치면 장필규도 역시 곡을 그치며 겨울부터 봄까지 서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장사함이 치통을 앓아 항상 침상에 있으면서 눈에 눈곱이 끼고 콧물이 흐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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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주정준은 유복아(遺腹兒)로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나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나이 40세 되던 해 우연히 안질을 얻어 갖은 노력을 다 했으나 10년 만에 불행하게도 실명하고 말았다. 주정준은 어머니의 눈병은 이제 신령의 힘을 빌어 치유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고, 매일 저녁 자정을 기해서 인근 우물에서 정화수를 입에 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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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충민사 입구에 있는 조선 중기에 건립된 하마비. 1603년(선조 36) 충민사(忠愍祠)가 이순신 사액사당 1호가 되었다. 궁궐이나 사찰 및 성균관, 사당 등 예를 갖추어야 하는 곳에는 하마비를 설치하였다. 하마비는 충민사에 올 때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기서부터는 누구나 말에서 내려 경건하게 예를 갖추라는 의미로 세워진 비이다.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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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본관은 창원(昌原). 호성공신(扈聖功臣) 효정공(孝貞公) 황진(黃璡)의 후손으로 황치연(黃致淵)과 김재택(金在澤)의 딸 김해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효자창원황공유수기행비(孝子昌原黃公遺秀紀行碑)에 따르면 황유수(黃遺秀)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과일, 채소와 같은 작은 것일지라도 밖에서 구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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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출신으로 전통시대에 효행으로 이름난 아들. 우리의 전통 사회에서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하여 사회 유지의 제일로 쳤는데, 그로 인해 그러한 실천적 행동을 한 사람들에게는 큰 포상을 했고, 그 포상을 받으면 또 가문의 영예로 간주했다. 여수에서도 효자로서 『삼강록(三綱錄)』에 오르고 국가로부터 포상을 받은 인물이 대단히 많았다. 출신 지역별로 보면, 삼일면에 19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