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7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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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烈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집필자 | 하창환 |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켜 포상을 받은 여자.
[개설]
전통 사회에서 여자는 주체적인 존재라기보다 남자에 종속된 존재였다. 따라서 결혼한 여인은 남편을 보필하고 집안을 건사하는 것을 가장 큰 책임으로 여겼고, 이를 위해 여인들은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을 요구받았다. 남편이 위급한 때는 단지수혈(斷指輸血)하는 것은 물론이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 남편을 따라 죽기까지 하였다.
의성 지역의 열녀들도 이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남편이 세상을 떠날 경우 뒤따라 죽거나 평생을 수절하며 온갖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가족들을 돌본 열녀가 다수이며, 임진왜란 때 자결한 사람도 많다. 열녀에 대한 기록은 『교남지(嶠南誌)』, 『영남읍지(嶺南邑誌)』, 『삼강 행실록(三綱 行實錄)』, 『의성 군지』 등에 남아 있다.
[목숨으로 열행을 실천한 의성의 여인들]
의성 지역에서 목숨을 버리며 열행을 실천한 인물로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기록에 전한다. 김종행(金宗行)의 처 성주 이씨[?~1791]는 결혼한 이듬해 남편이 병이 들자 극진히 간호를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자 1주기가 되는 제삿날 저승으로 남편을 만나러 간다며 못으로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박하륜(朴河倫)의 처 진성 이씨는 남편과 함께 불길 속의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 타 죽었다. 윤성모의 처 구산 박씨 순희(順喜)는 병든 남편을 구하기 위해 뱀을 잡아 달이는 등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자 저승에 가서 남편을 일으키겠다며 우물에 빠져 죽었다. 김민화(金敏華)의 처 안동 권씨는 신행 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로부터 46일 뒤에 자결하니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의 무덤에 무지개가 뻗혀서 연결되는 기적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이처럼 죽은 남편의 뒤를 따른 열녀로 박노윤(朴魯允)의 처 아주 신씨, 정국주(鄭國柱)의 처 안강 노씨 등이 있다.
의성에는 또한 임진왜란 당시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열녀들이 매우 많다. 문경제(文經濟)가 그의 아들 문응주(文應周)와 함께 왜구에 살해되자 그의 처 남양 홍씨와 며느리 함양 여씨, 그리고 손녀 문경자가 함께 반용담(蟠龍潭)로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김철(金喆)의 처 남양 홍씨는 남편이 왜구의 포로가 될 수 없다며 자결하자 따라 자결하였으나 다행히 사람들의 구함을 얻어 살아났다. 김치중(金致中)의 처 평산 신씨는 남편이 의병장으로 전투에 나갔다가 패전으로 자결하자 남편이 뛰어내린 곳에서 자신도 뛰어내렸다. 정태을(鄭太乙)의 처 박씨는 왜구들에게 겁탈당할 위기에 처하자 먼저 두 딸을 칼로 찌르고 자신 또한 자결하였다. 이처럼 적에게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결한 열녀로는 정일(鄭鎰)의 처 윤씨, 김도(金燾)의 처 하씨, 하식(河湜)의 처 박씨, 김계남(金繼南)의 처 하씨, 이광규(李光奎)의 딸 자매 등이 있다.
[수절로 열행을 실천한 의성의 여인들]
우리 속담 중에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승에서의 삶이란 고생의 연속이다. 더욱이 남편이 죽고 생활이 어려운 여인에게 있어서는 차라리 죽음이 홀가분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평생 수절을 하며 어려운 가정을 살려낸 의성 지역 열녀들은 다음과 같다.
김덕휘(金德輝)의 처 영양 남씨 [?~1939]는 19세 때 혼인하였으나 시댁에 이르기 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바느질과 길쌈으로 기울어져 가는 집안을 되살렸다. 배치용(裵致瑢)의 처 순흥 안씨는 그녀의 나이 19세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시부모의 만류로 살아남아 정성껏 그들을 모셨다. 시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묘를 하였다. 권승한(權承翰)의 처 의성 김씨 김삼규(金三奎)는 시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으나 어린 조카를 후사로 삼아 시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물론이고, 요절한 시동생의 가족들을 보살핀 열행으로 1953년 의성 경찰서장, 1959년 의성 군수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변두섭(卞斗燮)의 처 함창 김씨 김순근(金順根)은 22세에 남편을 잃고 청상의 몸으로 소작을 하며 홀시어머니를 모시면서 두 아들을 길렀다. 김록기(金錄起)의 처 양성 이씨는 17세의 나이에 남편 사별하여 평생을 수절하며 종질을 후사로 삼아 한 집안을 건사하였다. 김선광(金善光)의 처 경주 김씨는 그녀의 나이 22살 때 남편이 병들어 20년 동안 병상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으나 그 사이 길쌈으로 남편의 간호는 물론 시부모의 봉양을 극진히 하였다. 이처럼 남편을 일찍 여의거나 병중의 남편을 간호하며 집안을 건사한 열녀로는 그 외에도 박필녀(朴弼女)[1886~1967], 최남이(崔南利)[1889~1966], 설소현(薛素顯)[1895~1944], 윤경홍(尹敬洪)[1897~1972], 박효준(朴孝俊)[1898~1955], 신을출(申乙出)[1899~1984] 등이 있으며, 이들 모두 효열상을 받았다.
[의성 열녀들의 유적]
의성 지역에는 열녀들을 추모하는 다양한 기념물이 남아 있다. 열녀비(烈女碑), 창열각(彰烈閣), 효열각(孝烈閣), 정려각(旌閭閣), 효열비(孝烈碑), 표열각(表烈閣), 정열비(貞烈碑) 등이 그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의성읍 팔성 1리에 있는 김종행의 처 성주 이씨의 열녀비, 춘산면 옥정 2리에 있는 박하륜의 처 진성 이씨의 효열각, 봉양면 장대리에 있는 정태을의 처 박씨의 열녀비, 봉양면 문흥 1리에 있는 윤성모의 처 구산 박씨 박순희의 창열각, 비안면 서부 2리에 있는 김철의 처 남양 홍씨의 정려각, 비안면 쌍계리에 있는 배치용의 처 순흥 안씨의 효열각, 구천면 유산 1리에 있는 김덕휘의 처 영양 남씨와 함창 김씨 김순근의 효열비, 단밀면 주선 2리에 있는 이민화의 처 안동 권씨의 표열각, 안계면 위양 1리에 있는 정국주의 처 안강 노씨의 표열각, 다인면 용곡 1리에 있는 삼부녀 정렬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