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551 |
---|---|
한자 | 鄭斗亨 |
영어공식명칭 | Jeong Duhyeong |
이칭/별칭 | 천장,낙전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청희 |
[정의]
조선 중기 삼척 출신 문신이자 효자.
[개설]
정두형은 여러 관직을 거친 후 7도의 도사를 여러 해 동안 역임하고 1570년에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강릉부사를 자원하여 지냈다. 정두형의 효행을 기리려 정문이 세워졌다.
[가계]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고려 중기 문신으로서 내시, 예부시랑,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형양공(滎陽公)정습명(鄭襲明)[?~1151]의 후손이자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7세손이다. 도사(都事) 정치온(鄭致溫)의 손자이고, 장사랑(將仕郞) 순릉참봉(純陵參奉) 정충원(鄭忠元)의 아들이며, 교수 정규형(鄭奎亨)의 아우이다.
[활동 사항]
1507년(중종 2) 4월 12일 생으로 1540년(중종 3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44년(중종 39)에 별시 문과에 등제하였다. 평해·정선 군수 및 이부·호부·예부 정랑을 거쳐 고성수에 제수되고, 7도의 도사를 여러 해 역임한 뒤 1570년(선조 3)에 특전으로 강릉부사에 제수되었다. 몇 달 되지 않아 귀향하였다.
강릉 말산리(末山里)[지금의 강릉시 두산동]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가슴 위에 북두칠성과 같은 흑점이 7개가 있었다고 한다. 5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삼척 초분리(草紛里)[여지도서에는 삼척부 도상면 草粉里로 되어 있다. 지금의 동해시 북삼동에 해당한다.]에 와서 살았다. 1540년 경자 식년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44년 생원으로서 갑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박사(博士)·전적(典籍)·주부(主簿)를 거쳐 형조좌랑(刑曹佐郞)·호조정랑(戶曹正郞)을 거쳐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으로 있던 1553년(명종 8) 부친상을 당하여 3년 간 시묘(侍墓)살이를 마친 뒤 감찰(監察), 형조정랑(刑曹正郞), 영월군수(寧越君守)를 지냈다. 1560년(명종 15)에 다시 형조정랑이 되었다가 은계찰방(銀溪察訪)으로 있을 때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고향 근처인 고성군수(高城郡守)로 제수(除授)되었다. 충청·강원·경기·경상·함경·평안 7도 도사(都事)를 역임하고 1567년(명종 22) 공조정랑(工曹正郞)을 거쳐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로 있다가 1570년에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강릉부사(江陵府使)를 자원하여 지냈다. 이듬해에 모친상을 당하여 슬퍼한 나머지 세상을 떠나니 65세에 죽었다. 나라에서는 독실한 효행을 기려 부자와 함께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또 다른 기록에는 “대교·홍문관 박사를 거쳐 예조좌랑이 되고, 사간원 사간을 지낸 뒤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 천성이 순후하여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조심스럽고 꼼꼼하여 실수가 없었다. 또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서 하고자 하는 것은 난이(難易)를 막론하고 뜻대로 봉양하였고, 죽은 뒤에는 3년을 시묘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있을 때는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죽은 뒤에 효행으로 정려가 내려졌다.”고 지금까지 알려져 왔다. 그러나 통훈대부 행강릉부사 양사언찬이라고 음각되어 있는 동해시 비천동의 비천 마을에 있는 정두형의 묘비명에 보이는 기록과 그 내용이 너무 다르거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 비문의 내용 가운데 중요한 구절만을 뽑아 부기하고 천박한 재주를 쥐어짜 우리말로 옮겨 두니 강호제현의 질정과 정리를 바란다.
“정덕정묘(1507년, 중종 2) 4월 12일생 가정경자(1540년, 중종 35) 사마시 갑진(1544년, 중종 39) 별시 문과 등제 평해·정선 군수 이호예부정랑을 거쳐 고성수에 제수되고 7도[충청, 강원, 경기, 경상, 함경, 평안, 전라]의 도사(都事)를 여러 해 역임하고 선묘경오(1570년, 선조 3)에 특전으로 강릉부사에 제수되었다. 몇 달 되지 않아 귀향하였다. 이듬해인 신미년에 부친상을 당하니 당시 공의 나이 65세였다. 슬픔이 지나쳐 병이 되어 같은 해 10월 15일에 죽었다.[正德丁卯四月十二日生 嘉靖庚子司馬甲辰別試登文科 平海旌善郡守 吏戶禮正郞又除高城守歷七道都事屢年 宣廟庚午 特除江陵府使 未幾月投?歸鄕 翌年辛未遭父喪時公年六十有五 哀毁致疾是年十月十五日卒.]” 효성이 지극한 정두형 부사가 부친의 간병을 위해 강릉부사직을 사임한 후 귀향하여 부친의 병을 간호하면서 지내다 이듬해인 신미년에 부친상을 당하자 지극한 효성으로 시묘하던 정두형 부사도 부친이 돌아가신 같은 해 10월 15일에 별세하였다는 내용이다.
낙전당(樂全堂)은 1569년(선조 2)에 승지를 지낸 정두형이 북평읍 봉정리에 세웠다.
[묘소]
강원도 동해시 비천동 비천 마을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독실한 효행을 기려 부자와 함께 정문이 세워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