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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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陟陟州東海碑 |
영어공식명칭 | Samcheok Cheokjudonghaebi Mounment |
이칭/별칭 | 동해비,퇴조비,진동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미수2길 17|강원도 삼척시 정상동 108-1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상수 |
건립 시기/일시 | 1662년(현종 3) - 삼척척주동해비 건립 허목이 정라(汀羅) 만리도(萬里島)[지금의 정라동 큰방파제 끝]에 ‘동해비(東海碑)’를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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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710년(숙종 36) - 삼척척주동해비 이전 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관도 동쪽 기슭으로 비각까지 짓고 옮겨 세움 |
이전 시기/일시 | 1969년 12월 6일 - 삼척척주동해비 이전 현재의 위치인 육향산 정상으로 이전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709년(숙종 35) - 삼척척주동해비 재건 부사 홍만기(洪萬紀)가 죽관도(竹串島)[지금의 육향산]에 다시 세움.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95년 12월 11일 - 허목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82년 4월 27일 - 허목 사망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1년 12월 16일 - 삼척척주동해비및평수토찬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 지정 |
현 소재지 | 삼척척주동해비 - 강원도 삼척시 미수2길 17 |
성격 | 기적비 |
관련 인물 | 허목 |
재질 | 오석|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높이 175㎝×너비 76㎝×두께 23㎝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삼척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강원도 유형문화재 |
[정의]
강원도 삼척시 정라동 육향산에 있는 비석.
[개설]
삼척 척주동해비는 강원도 삼척시 정라동육향산 정상부에 위치하며, 조선시대 삼척부사 허목이 1661년(현종 2)에 세운 비석이다.
[건립 경위]
1660년(현종 원년) 허목이 삼척부사로 부임한 당시 동해 바다의 조수가 시내까지 들어오고, 여름철 홍수로 인해 삼척의 젖줄인 오십천(五十川) 하구가 막히고 범람하여 가옥과 농작물이 유실되는 등 주민들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허목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자연재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철학의 극치와 신비로운 문장으로 ‘동해송(東海訟)’을 짓고 독특하고 웅혼한 전서(篆書)로 비문을 써서 정라(汀羅) 만리도(萬里島)[지금의 정라동 큰방파제 끝]에 ‘동해비(東海碑)’를 세웠다. 이후 자연도 척주동해비의 신비로운 문장 위력과 덕화(德化)에 감동되었는지 조수의 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수를 물리치는 위력이 있는 신비한 비석이라 하여 일명 ‘퇴조비(退潮碑)’ 또는 ‘진동비(鎭東碑)’라고도 불린다. 중간에 풍랑에 의해 비석이 부러져서 바다 속에 빠지자 허목(許穆)[1595~1682]이 이 소식을 듣고 고쳐 썼다. 1709년(숙종 35) 부사 홍만기(洪萬紀)가 허목의 문하생 한숙(韓塾)[1646~1710] 처소에서 비석의 원문을 구해 모사하여 죽관도(竹串島)[지금의 육향산]에 다시 세웠으며, 1710년(숙종 36) 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관도 동쪽 기슭으로 비각(碑閣)까지 짓고 옮겨 세웠다. 1969년 12월 6일 현재의 위치인 육향산(六香山) 정상으로 이전하였다.
척주동해비는 허목의 학문 세계인 6경 중심의 고학(古學)이 응축되어 있는 작품으로, 그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동해를 칭송한 부분, 중국 주변의 여러 종족[오랑캐] 소개 및 그들의 교화 과정을 설명한 부분, 오랑캐를 교화시킨 옛 성인을 찬양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허목의 학문 세계인 고학의 내용인 ‘옛 성인의 도’를 칭송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위치]
삼척 척주동해비는 강원도 삼척시 미수2길 17육향산 정상부에 대한평수토찬비와 함께 위치하고 있다.
[형태]
삼척 척주동해비는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졌다. 비신(碑身) 형태는 뚜껑돌[개석(蓋石)] 없이 윗부분을 일직선으로 밋밋하게 처리하고, 양 모서리에 약한 각이 진 직수형(直首形)에 가깝다. 비석 받침인 비좌(碑座)는 화강암으로 만든 사각형[방형(方形)]이며,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전반에 걸쳐 장식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70㎝×너비 76㎝×두께 23㎝이다.
[금석문]
전면: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좌측면:주고실직씨지허재예맥남거경도칠백리동임대해 도호부사 공암 허목서(州古悉直氏之墟在濊貊南距京都七百里東臨大海 都護府使 孔嵓 許穆書)
우측면:현종이년선생래수시방찬전동해비어정라도위풍랑격침선생문이개서금참고양본대자용구본소자용신본각수우 죽관도시상지삼십오년기축춘삼월야(顯宗二年先生來守是邦撰篆東海碑於汀羅島爲風浪激沈先生聞而改書今參考兩本大字用舊本小字用新本刻竪于 竹串島時上之三十五年己丑春三月也)
후면:영해망양 백천조종 기대무궁 동북사해 무조무석 호위대택 적수계천 발휼왕예 해동유에 명명양곡 태양지문 희백사빈 석목지차 빈우지궁 일본무동 교인지진 함해백산 한한만만 기물휼궤 완완지상 흥덕이장 방지태주 여월성쇠 방기승비 천오구수 괴기일고 표회차우 출일조돈 교알현황 자적창창 삼오월영 수경원령 렬숙도광 부상사화 흑치마라 촬계보가 단만지호 조와지후 불제지우 해외잡종 절당수속 동유함육 고성원덕 백만중역 무원불복 황재희재 대치광박 유풍막재(瀛海漭瀁 百川朝宗 其大無窮 東北沙海 無潮無汐 號爲大澤 積水稽天 浡潏汪濊 海東有曀 明明暘谷 太陽之門 羲伯司賓 析木之次 牝牛之宮 日本無東 鮫人之珍 涵海百産 汗汗漫漫 奇物譎詭 宛宛之祥 興德而章 蚌之胎珠 與月盛衰 旁氣昇霏 天吳九首 怪虁一股 颷回且雨 出日朝暾 轇軋炫煌 紫赤滄滄 三五月盈 水鏡圓靈 列宿韜光 榑桑砂華 黑齒麻羅 撮髻莆家 蜑蠻之蠔 爪蛙之猴 佛齊之牛 海外雜種 絶黨殊俗 同囿咸育 古聖遠德 百蠻重譯 無遠不服 皇哉熙哉 大治廣博 遺風邈哉)
[현황]
현재 척주동해비는 전면에 ‘척주동해비각(陟州東海碑閣)’, 후면에 ‘동해비각(東海碑閣)’이라고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는 비각 안에 있으며, 1971년 12월 16일 육향산에 있는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讚碑)와 함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척주동해비는 허목의 학문 세계인 6경 중심의 고학이 응축되어 있는 작품으로, 서체·문장·내용 등에서 큰 의미와 가치가 있다. 서체는 고학의 영향으로 고체인 전서체를 사용하였는 바 “천년 묵은 마른 등나무 같다” “귀신이 쓴 것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글자가 기이하지만 힘이 있다. 조선 후기 당시 중국에서도 한나라 이후 허목의 전서체를 따라 올 자가 없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문장 역시 고학의 영향으로 고문(古文)을 사용하였으며, 조선 후기 당시에 이미 “고문에서 제일이다”라는 평가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