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14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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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향수를 달랜 치마바위」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경자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1년 - 「치마바위」 정성용[남, 75]·정영선[남, 47]에게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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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83년 - 「치마바위」 밀양군에서 발행한 『미리벌의 얼』에 「향수를 달랜 치마바위」라는 제목으로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83년 11월 25일 - 「치마바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8-7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9년 12월 30일 - 「치마바위」 『밀양설화집』1에 수록 |
관련 지명 | 학골 -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
채록지 | 무안리 -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
성격 | 전설|암석 유래담 |
주요 등장 인물 | 안이동의 10대조 할머니|박 좌수 |
모티프 유형 | 암석 유래|자라는 돌|신선의 하강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있는 치마바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치마바위」는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있는 치마바위에 얽힌 이야기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피하여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부로리(扶老里)[지금의 무안면 무안리]에 정착한 안씨 집안의 할머니가 향수를 달래고자, 고향 함안의 반반한 돌 하나를 치마폭에 싸 온 것이 소변을 보는 사이 바위만큼 커졌다. 사람들은 안씨 할머니가 싸 온 돌이 변한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불렀다. 신선들이 치마바위 위에 내려와 바둑을 두고, 학과 더불어 춤추며 놀았다고 하여 ‘신선바위’라고도 하였다. 「치마바위」를 기반으로 하여 재구성된 신선바위학춤이 오늘날 밀양시의 무형 문화유산의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미리벌의 얼』에 수록된 「향수를 달랜 치마바위」의 채록 시기와 구연자는 알 수 없다. 『미리벌의 얼』에 수록된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1981년 1월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서 정성용[남, 75], 정영선[남, 47]에게 채록한 자료가 1983년 11월 25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8집 7책에 「치마바위」로 수록되었다. 2009년 12월 30일 밀양시에서 발행한 『밀양설화집』 1권에 『미리벌의 얼』에 수록되었던 이야기가 「치마바위」라는 제목으로 다시 수록되었다.
[내용]
치마바위는 밀양시 무안면 부로리[지금의 무안면 무안리] 북산 학골[뜸북골]에 있는 암석인데, 가로 111㎝, 세로 99㎝, 높이 31㎝ 정도 되는 바둑판처럼 생긴 바윗돌이다. 옛날 치마바위에 신선들이 와서 바둑을 두고, 학과 더불어 춤추며 놀았다고 하여 ‘신선바위’라고도 부른다. 치마바위는 임진왜란을 피하여 부로리에 들어와 정착하였던 안이동의 10대조 할머니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고향 함안에 갔다가 반반한 돌 하나를 치마폭에 싸 온 것이라고 한다. 비록 임진왜란을 피하여 타향에 정착하기는 하였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 버릴 수 없어 고향의 돌 하나라도 갖다 놓고 향수를 달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을 싸 오다가 잠시 내려놓고 소변을 보고 난 후, 다시 들려고 하니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돌이 커져 버렸다고 한다. 할머니는 하는 수 없이 돌을 그대로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안씨 집안은 번창하였는데, 세월이 흘러 안씨 집안이 쇠잔하여지자 부로리의 박 좌수(座首)가 치마바위를 자기 집 정원에 갖다 놓았다. 그때부터 박 좌수의 아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여 무당에게 물으니 바위 때문이라고 하였다. 박 좌수가 바위를 제자리에 옮겨 놓았더니, 아들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치마바위를 북산 학골에 옮긴 안이동의 10대조 할머니는 진양강씨(晋陽姜氏) 강백지(姜白之)의 딸이다. 할머니의 아들 안명립(安命立)은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는데, 뜸북골에 안명립의 묘가 있다.
[모티프 분석]
「치마바위」의 주요 모티프는 ‘암석 유래’, ‘자라는 돌’, ‘신선의 하강’이다. 암석의 유래담 중에서도 독특한 서사를 지니고 있는 이야기다. 치마바위는 원래 한 할머니가 향수를 달래기 위하여 고향에서 치마폭에 싸 온 작은 돌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잠시 내려놓고 소변을 보는 사이 돌은 순식간에 자라서 들 수도 없는 큰 바위가 되었다. 이로써 치마바위는 신성성을 획득하였는데, 바위의 영험이 할머니 후손의 높은 벼슬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바위를 옮겨 오자 집안에 변고가 일어남과 신선의 하강 또한 치마바위가 지닌 신성성의 증표이다. 치마바위는 암석이 지니는 항구성에 기대어 오늘날은 지역 무형 문화유산 형성의 초석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