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756 |
---|---|
한자 | 密陽孫氏 集成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노규현 |
본관 | 밀양시 - 경상남도 밀양시 |
---|---|
입향지 | 내일동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밀양 손씨 집성촌.
[개설]
밀양손씨(密陽孫氏)는 시조가 서라벌(徐羅伐) 육부촌장(六部村長)의 한 사람인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의 원손(遠孫)인 손순(孫順)이다. 손순은 신라 모량리(牟梁里)[현 경상북도 월성군 건천읍 모량리] 출신으로 효행(孝行)이 뛰어나 흥덕왕(興德王) 때 월성군(月城君)에 봉군되었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손순매아(孫順埋兒)」 효행 설화가 있다.
손순의 장손 손익감(孫翼減)이 나라에 공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밀양(密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또 손순의 6세손 손긍훈(孫兢訓)은 밀양손씨의 중흥조이자 경상남도 밀양에 처음 적을 올린 입향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손긍훈은 밀양부 향리로서 고려 태조를 도운 공으로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졌고, 추화산 정상의 성황사 사신(祠神)으로 모셔졌으며, 묘소는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校洞)에 있다. 손긍훈의 12세손 손빈(孫贇)은 고려 충렬왕 때 급제하여 정당문학을 지낸 뒤 밀성군(密城君)에 봉하여졌다.
[형성 및 변천]
손긍훈의 입향(入鄕) 시거지(始居地)는 밀성(密城) 남정촌(南亭村)[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이고, 이후 후손들의 집거지(集居地)는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내이동(內二洞)· 삼랑진읍(三浪津邑) 임천리(林川里), 단장면(丹場面) 법흥리(法興里), 상남면(上南面) 내금동(內今洞), 부북면(府北面) 덕곡리(德谷里), 산내면(山內面) 송백리(松栢里) 우송정(雨松亭), 산외면(山外面) 남기리(南沂里)·다원리(茶院里)·다죽리(茶竹里)이다.
밀양손씨는 최초 입촌한 경상남도 밀양 시내를 비롯해 손겸제(孫兼濟)가 이거한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죽동에 집중적으로 거주한다. 죽동에 거주하는 밀양손씨는 주로 손광(孫洸)의 4남 손영의 후예이다. 밀양시의 다른 곳에도 집성촌이 있는데, 예컨대 손수국(孫壽國)이 죽원(竹院)[현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원리]에서 이사한 밀양시 산내면 송백리가 대표적이다. 또 손탁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문적 소실로 선대 계통이 미비한 손태좌(孫台佐)가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에 정주하였다. 증손 손충보(孫忠輔)는 임진왜란 때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에서 영산 길곡(吉谷)[현 경상남도 창녕군 길곡면]으로 이사했고, 손충보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자손들이 몇 대를 살다가 밀양시 부북면 덕곡리(德谷里)로 돌아왔다. 또 손시도의 7세손 손수(孫洙)는 삼랑진 금음물리[현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임천리]에 살았다. 손경검(孫敬儉)의 증손자 손몽길(孫夢吉)은 임진왜란 때 출생지 사포리 송악동[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을 떠나 영산 도천리[현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도천리]로 이사하였는데, 손경검의 6세손 손명일(孫命一)이 1725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덕곡리로 복귀하여 터전을 새로 일구었다.
밀양손씨의 여러 계파 중 교동파의 세거지는 밀양시 교동 밀양향교 아래에 있다. 조선 후기 현종 때 손성증(孫聖曾)이 밀양향교 아래에 들어와 살면서 밀성손씨 동성마을이 되었다. 교동마을은 밀양향교 정문과 연결되는 남북으로 난 긴 마을 안길을 중심으로 크게 동촌(東村)과 서촌(西村)으로 나뉜다. 동촌에는 손영배 가옥, 손병구 가옥, 손병일 가옥, 손병순 가옥, 손정규 가옥, 손대곤 가옥, 손대식 가옥 등 7채의 한옥이 남아 있고, 서촌에는 손병준 가옥, 손정식 가옥, 손대식 가옥 등 3채가 있다. 건축 시기는 대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이다. 이 중 중심이 되는 가옥은 마을 제일 안쪽에 위치한 교동 손씨 고가 손영배 가옥이다.
교동 손씨 고가 손영배 가옥은 밀양시 교동 731번지[동촌]에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61호이다. 밀양향교에서 가장 가깝고 마을의 가장 안쪽에 있는 동촌 중심 가옥이다. ‘만석꾼 집’ 또는 ‘열두 대문 집’으로 불리는 99칸 대저택으로 손성증이 처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 중 안채는 1880년대에 지어졌고, 사랑채는 1912년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로 긴 약 3,300㎡[1,000여 평]의 대지 위에 서쪽은 안채를 중심으로 한 안마당과 동쪽으로 ‘ㄹ’자형의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사랑 마당, 대문채의 행랑 마당, 그리고 중사랑채가 있는 중사랑 마당으로 동선 구분이 명확한 전형적인 도시형 배치 형태를 이룬다.
동남쪽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좁고 길어 통로 역할을 하는 행랑 마당이 있다. 행랑 마당 정면에 중사랑채로 통하는 협문이 있고ㅡ 우측의 행랑채에 난 중문을 통하여 사랑 마당으로 연결된다. 사랑 마당은 사랑채와 ‘一’자형의 곡간채, 행랑채가 ‘ㄴ’자형으로 일체화된 부속채가 중사랑채 및 안채로 통하는 안중문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랑채 뒤편에는 연못과 석등이 있었다고 하나, 2022년 현재는 없어지고 후원이 조성되어, 낮은 동산을 중심으로 수목을 심어 놓았다. 사랑대청 배면의 유리창을 열면 후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랑 마당에서 좌측으로 2m 정도 높이의 계단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一’자형 안채와 2동의 각기 다른 부속채가 ‘ㅁ’자형의 안마당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높이 차이는 경사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안채의 좌측 화계(花階)에는 대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건물들과 좋은 조화를 이룬다. 안채와 사랑채를 사이에 두는 북쪽에는 가묘를 두고 있다.
손병구 가옥은 밀양시 교동 779번지[동촌]에 있다. 밀양 교동 근대 한옥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151호이다. 마을 안길을 사이에 두고 손영배 가옥과 마주 보고 배치되어 있는데, 손영배 가옥에서 분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채는 1915년경에 지어졌고, 사랑채는 1937년에 지어졌다. 교동마을 한옥 중에서 손병구 가옥과 손병순 가옥은 대문채 앞에 짧은 고샅을 두고 대문을 90도로 틀어 배치하여 마을 안길을 가운데 두고 인접한 두 집의 대문이 대면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두 가옥의 고유한 공간적 성격을 확보하면서 불필요한 외부 시선으로부터 사생활을 보호할 필요에서 이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